나의 풍경

그 후로도 오랫동안

라즈니쉬 2014. 5. 4. 00:19

 

1. 수정 국민학교 1학년!

 

부산진역앞 수정국민학교!...

방향이 각기 다른 네 개의 건물이 병풍처럼 운동장을 둘러싸고 있었던 학교.

학급수는 많고 운동장은 작은 관계로 3일간에 걸쳐 운동회를 열어야했던 학교.

첫째날은 1,2학년... 둘째날은 3,4학년... 셋째날은 5,6학년...

 

이 학교에서 급식으로 난생 처음 타먹어 본 미국산 옥수수 빵의 경이로움.

일단은 빵의 크기가 7(니들은 8^^)라는 나이에는 미처 먹어보지 못한 압도적인

크기였으며, 막 구워져나온 듯한 보기좋은 거무스르함이 상단부분을 덮고 있어 더

먹음직스러웠으며, 이렇게 맛있는 빵을 학교란 곳에서 그것도 공짜로 준다니...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빵들은 1~2년후 공급이 중단되었으며, 3학년때부터는

월 정액을 내는 애들에게만 빵과 우유를 주는 급식제도가 생겼었지.

 

자갈치 어시장이 멀지않은 동네라 생선장수들이 많아서 그런지

동네 골목의 담벼락 위 가시돋힌 철사줄에는 햇볕에 말리는 납세미(도다리)와 작은 생선들이

항상 걸려있곤 했었는데...

그 생선을 동네 형들과 한 두 마리씩 서리해서 골목길에서 구워먹으며 놀았던 동네.

그 동네에서 1학년을 마치고...

 

2. 2학년... 전학을 오다.

 

2학년때 강동국민학교로 전학을 왔었다.

당시 2이라는 행정동의 위치가 부산 중심에서 꽤 외곽(변두리)에 속해 있었다는 건

그로부터 한참 후 철이 들고 나서 알게된 사실이지만, 전학신고를 하러 첫날 운동장에 들어선

느낌은 ?... 무슨 학교가 이렇게 작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라면 모두 수정만큼이나 큰 줄로만 알고 있었거든.

 

그리고 처음 들어선 운동장은 바닥이 너무 거칠었다.

수정운동장은 바닥이 부드러운 모래로 매우 잘 다져져 있어서 웬만큼 놀다 넘어져도

팔이나 손에 상처가 안생긴 반면, 여긴 자칫 넘어지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피가 나겠다는 느낌.

모래로 다져진 운동장이라고 보기엔 작은 돌도 너무 많았고 여기저기 모래가 아닌 맨 땅도 존재했었던 것 같아.

 

수정운동장이 모래밭이었다면 강동운동장은 그야말로 자갈밭이었으며,

수정이 신도(학생)수도 많고 시설도 좋고 헌금도 많이 들어오는 일류교회였다면,

강동은 이제 막 세워서 여기저기(특히 운동장 가장자리와 화단쪽)를 보수하기에 바빴던

개척교회 같았다는 느낌이 든다. ^^...

 

그리고 어머니를 따라 교장실의 배가 많이 나온 교장선생님께 전학신고를 했다.

교장샘에게 인사하고, 교장샘은 내 이전학교에서 대봉투에 동봉해준 몇몇 서류등과

내 성적표를 훑어본 후 어머니앞에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으로

전학식이란 의례는 완료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반 배치를 받았는데...

기분이 또 울적했던 건 담임 여선생님이 수정의 담임 여선생님보다 못생겼어. ㅎㅎㅎ...

수정1학년 여담임은 이쁜 누나같았다면 강동2학년 여담임은 그냥 아주머니였어.

그 아주머니같은 여선생님이 누구였냐면... ‘고금아선생님. ^^...

 

전학온 지 보름이나 되었던가?...

전학생이라서 그랬던지 나를 다른 애들보다 조금은 눈여겨봤을 고금아선생님이

우리 교실에 놀러온 옆반 여선생님 앞에서 나를 가리키며 하던 말.

저거 저렇게 부끄러움을 타서 장개나 가겠나?’...

나는 슬며시 복도로 내빼며 내심 울컥!...ㅎㅎㅎ...

그러나 고금아 선생님은 나를 이모저모로 꽤나 이뻐해 주셨다.

애들은 고금아 선생님 이름을 고구마 선생님이라고 바꿔부르며 웃고 놀았지.

 

전학온 지 한달여가 지났을까?...

그럭저럭 애들하고 어울리며 별 무리없이 적응을 해가던 어느 하루...

 

방과후에 운동장을 가로질러 하교하고 있을 때, 뒤에서 ~’... 하고 누가 큰소리로 불러.

뒤돌아보니 어떤 남자가 멀리서부터 성큼성큼 걸어오더라고...

그래서 멀뚱히 바라보고 서 있었는데 그 남자가 내 앞에 다가와 서더라.

내가 조금 놀란 눈으로 자기를 올려다보고 서있어서 그런지 내게 빙그레 웃으며

조심스런 말투로 ... 어디서 왔니?’... 그러더라고.

 

뭐라?... 내가 어디서 왔냐고?... 이 때는 어떻게 대답해야 되는거지?...

여긴 일단 학교니깐... 그러면 우리 집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해야 되는거야?...

머릿속으로 막 그런 생각을 하며 대답을 어떻게 해야 될 지 알 수 없어서

남자를 올려다보며 눈만 굴리며 가만히 서 있었어.

 

그랬더니 남자가 또 웃으며 하는 말이 너 전학왔지?... 어느 학교에서 왔니?’... 하는거야.

그제서야 나는 수정... 국민학교요’... 라며 죄지은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어.

(씨바, 진작에 그렇게 물을 것이지 학교에 있는 애보고 다짜고짜 어디서 왔니?’...라고

묻다니... 우리 엄마 뱃속에서 왔다. ?... ㅎㅎㅎ...)

 

남자 - 동구 수정동?... 수정국민학교?...

- 예에...

남자 - 하하... 그래서 교복을 입었구나.

- ???...

남자 - 그래... 집에 조심해 가거라...

 

알고보니 그 남자는 선생님이었어,

고학년 애들은 아직 수업이 안끝나서 운동장에서 뛰어노는데, 운동장 중간을 가로질러

교복을 입은 애가 걸어가는 게 자기 눈에 보였겠지.

그리고 쟤는 무조건 전학온 애일거다’... 생각하고 어디서 전학왔는지가 궁금해서

나를 불러 세웠던거야.

 

그러고 보니 당시 내 주변엔 정말 교복입은 애들이 거의 없더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부산 시내 중심에 있었던 학교는 어느 년도부터 교복착용을 의무화했지만

시범기간을 두고 학교별로 자율에 맡기기로 해서 그랬던지 강동은 그 당시 교복착용을

의무화하지는 않았던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확실치는 않지만.

 

학교건물도 쪼그마해... 땅바닥(운동장)도 안좋아... 담임선생님도 안 이뻐...

애들이 교복도 안입어... 엄마요!... 왜 날 이 후진(^^) 학교로 끌고 오셨소?... ㅎㅎㅎㅎ...

 

 

3. 개의 교미를 처음 목격하다.

 

하굣길의 어느 하루!...

사람들 십수명이 인철이와 인규집 앞 다리에서 어떤 공간을 둘러싸고 웅성거리며 있었는데...

 

호기심에 사람들 사이로 그 안을 들여다봤더니,

아 글쎄, 개 두 마리가 서로 똥구멍이 붙어있는게 아닌가?...

그 옆의 개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는 개 두 마리를 떼어놓으려 빗자루를 마구 휘둘렀고,

개들은 놀라서 똥구멍이 붙은 채로 빙글빙글 돌며 이리저리 도망치고 있고...

구경거리가 드문 동네에서 보기 드문 장관이었으며 내딴엔 충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결과 난 너무 우스워서 긴바지와 신발이 흥건하게 다 젖도록 그 자리에서 오줌을 쌌으며,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집까지 근근이 걸어온 후, 그 개들이 개 주인에게 맞았듯이 엄마의

빗자루 세례를 받아내야 했다.

엄마의 왜 쌋냐고 묻는 말에 개 두 마리가 똥구멍이 붙어서...’ 어쩌고 저쩌고 설명했더니

엄마는 그게 뭐가 우습냐?’...며 마구 화내며 빗자루 세례를...

 

그녀가 살아계시다면 지금은 이렇게 해명하고 싶다.

, 엄마는 알 거 다 알아서 안우습지만, 난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고

우스워 죽겠는 걸 어쩌라고?... 도대체 똥구멍이 왜 붙냐고?...

너무 우스워서 바지내리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오줌이 나왔단 말이야‘...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세탁기도 없던 시절이라 엄마들의 애들 옷 빨기의 번거로움은 둘째 치고,

당신의 귀한 자식이 2학년인데 아직 오줌도 못가린다는 생각에 어머니는 화가 났던 것 같다.

 

 

4. 합창대회와 고전읽기 대회.

 

3학년때 담임은 무척 부드러운 느낌의 여선생님이었다.

 

학교건물 같은 층에 3학년과 4학년 교실이 절반으로 나눠져 있었으며,

3학년 교실은 교실 앞문과 뒷문이 목재였고 교실 안도 좀 어두웠던 느낌이라면

4학년 교실이 위치한 쪽은 교실과 복도가 모두 밝고 깨끗했다는 기억.

 

3학년 교실문은 미닫이 문이었고, 4학년 교실문은 여닫이 문이었다.

아마도 학교를 짓는 과정에서 기간이 오래 걸렸거나 아니면 먼저 일부를 지은 후,

증축을 하는 과정에서 시공 재료들이 달라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3학년 때... 어느 시기에 부산 시내에 국민학교 합창대회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애들중에서 지원자를 뽑아 한 반에 몇 명씩 차출해서 합창단을 조직했고,

방과후에 어떤 여선생님이 목재로 된 3학년 교실에서 연습시켰었는데,

그 때 나도 합창단에 포함되어 연습했던 기억이 난다.

시내 어느 학교에 가서 대회를 치렀는지, 또 대회 후 수상 여부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3,4학년 시기 즈음해서 고전읽기 대회라고 있었는데,

교과책이 아닌 고전동화 몇 종을 읽은 후 그 독후감을 써내는 대회였다.

그 때 교내 대회에서 뽑힌 몇 명의 애들이 토성국민학교를 비롯한 몇 개 시내학교에

가서 참가하곤 했던 기억...

 

 

5. 가정방문

 

4학년 1학기엔 샤프하고 잘 생긴 남자 선생님이 담임이었는데,

그 후 교원 인사이동이 있었고 전근오신 여자 선생님이 담임을 맡았다.

머리는 긴 생머리였고 이름은 백성희라는 여선생님이었는데,

사거리 백상재의 집 맞은 편이고, ‘지영일집 앞쪽에서 자취를 하셨던 것 같다.

그 외에도 사거리 부근에서 자취를 하셨던 미혼 선생님들이 몇 분 계셨던 듯 한데,

나와 몇몇 애는 학교와 선생님 집 사이를 물건 심부름도 종종 다녔던 기억이 있다.

 

4학년 들어서서 선생님들의 첫 가정방문이 시작되었는데...

나도 그렇지만 가난한 애들과 부모님들은 선생님이 집에 찾아오는 가정방문을 싫어했었다.

그 이유로 첫번째는 자신들의 가난을 외부에 보이기 싫었음이었을 것이며,

두 번째는 찾아오시면 의례히 뭐든 대접을 해야한다는 번거로움과 부담감때문이었지 싶다.

 

그래서 선생님이 애들과 가정방문 날짜를 잡자고 하면,

가난한 집 애들은 이미 부모님께 들었던 대로 선생님과 상담시에

부모님 일보러 가셔서 집에 안계신다’...고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방문을 연기시키곤 했다.

그러다 가정방문 기간이 끝나면 그대로 넘어가는 것이었고...

 

백선생님도 결국 우리집에 오셨을 때는 부모님과는 못만나 뵙고

집 위치만 대략 파악하고 가셨더랬는데...

선생님이 나와 함께 집으로 걸어가던 중 하시던 말씀 한마디가 기억에 남아있다.

‘00!... 너 참 재미있는 곳에 산다’... 난 당시엔 내심 무슨 말씀인가 싶었지만

커서 생각하자니 선생님 입장에선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왜냐하면 우리 집이 징검다리도 건너고, 산 넘고 물 건너야 올 수 있는 곳이었거든. ^^

 

6. 생애 최초 최후의 폭행사건

 

4학년때 교실내 학생들의 분단수가 5분단인지 6분단인지는 기억이 명확하지 않다.

 

같은 반에 눈이 또록또록한 여자애가 있었다.

그 당시 어린 우리로서 생각키엔 참 신기하고 희안한 일이 한가지 있었는데,

곰돌이 푸우처럼 귀엽게 생긴 한 남자애가 걔 남동생이라며 우리와 같은 학년이었던거다.

뭐지?... 쌍둥이?... 쌍둥인데 어째서 한 명은 남자고 한 명은 여자지?... 등의 말을 하며

친구들끼리 신기해했던 것 같다.

세월을 떠나 지금도 이란성 쌍둥이는 좀 신기한 일이긴 하지만... ㅎㅎ...

 

4학년때 그 애의 남동생도 아마 나와 같은 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걔의 자리는 운동장을 바라볼 수 있는 1분단 창가쪽의 중간자리였고,

3분단에 속한, 교실 앞뒤로 따지자면 걔와 비슷한 열의 중간자리였는데...

한번씩 공부시간 도중에 운동장쪽으로 고개를 돌려 볼 때면,

걔는 손으로 턱을 괴든 괴지 않든간에 어김없이 정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던

모습을 자주 봤던 것 같다.

 

그 때 느낌을 형용해 보자면, 눈이 또록또록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뭔가 범접할 수 없는... 딱딱한... 정사각형처럼 똑바른...

말로 싸우면 도저히 내가 못이길 것 같은... 대략 그런 느낌들...

 

그러던 어느 하루...

도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 사건의 전후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쉬는 시간에 내 책상 앞쪽 바닥으로 누가 내 책과 연필통 등을 집어 던졌는지

내 물건들이 교실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난 앉아서 그걸 줍고 있었더랬다.

그런데 뒤에서 뭐라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서 뒤를 돌아다보니 그 애가 꼿꼿하게 서서

겁나리만치 눈을 또록또록하게 뜨고 나를 향해 뭐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안그래도 내 책과 연필 등 문구들을 누가 던졌나 싶어서 화가 나있던 마당에,

그 애가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또 죄없는 나에게 고함을 친다 싶으니 나도 화가 났지 싶다.

난 바닥에 문구를 줍다가 일어서서 걔에게 서너걸음을 다가갔고,

잠시 후 주먹으로 걔의 배를 내질렀다.

그랬더니 걔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난 그렇게 강하게 보이던 애가 내게 한 대 맞고 울 줄은 전혀 짐작을 못했거든.

그 때 그 애는 정말 나에게 맞은 배가 못내 아파서 울었는지, 아니면 여자애로서 어떤

머시마에게 맞았다는 그 상황이 일단 창피해서 쪼그려앉아 울어버렸는지는 알 길이 없다.

난 순간 매우 당황스러웠지만 이미 내 앞에서 순간적으로 벌어져버린 일이었다.

 

바닥의 문구를 줍던 동작을 멈추고 일어선 후 걔에게 서너걸음을 다가갈 때만 하더라도,

사실 그 애의 뺨이나 몸 어떤 부분을 때리려는 마음으로 다가간 건 아니었다.

그런데 몇걸음 다가가서 걔 앞에 서는 순간 내가 발견한 것은,

걔의 눈에는 나로선 도저히 감당해내지 못할 어떤 결기가 서려있는 게 아닌가?...

 

내가 얘에게 뭘 잘못한거지?’...하는 생각도 잠시 들긴 했었지만,

그 순간에 난 걔가 소리친 이유를 어떻고 저떻고 묻기보다는,

걔가 눈을 부라리고 있는 이 상황을 무조건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상황을 빨리 끝내는 방법이 나로선 일단 한 대 때리는 것!... 단지 그것뿐이었다.

(지금 글을 쓰는 동안에도 걔의 무서운 눈빛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걔의 배에 주먹을 날렸던

순간의 내 가슴의 두근거림도 생생하게 살아난다.)

 

주먹질 한 번으로 난 그 애의 무서운 눈길로부터 일단 벗어나는 데는 성공하긴 했는데,

그 애는 지금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있다. 교실 한 쪽 어딘가에서는 이 애의 남동생도

자기 누나가 나에게 맞고 울고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지 모른다.

내가 갑자기 왜 그랬지?... 왜 내가 이 애를 때렸지?... 순간 막심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러고 나서 걔가 우는 걸 등 뒤로 한 채 내 뒷편쪽 바닥의 문구를 마저 주웠고,

쭈뼛거리며 내 자리에 앉았던 것 같다. 그리고선 종이 울리고 새 수업시간이 시작되었던가?...

 

그 후로 난 걔와 졸업할 때까지 단 한마디 말도 나눈 기억이 없다.

그리고 내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졸업할 때까지 걔 아닌 다른 어떤 여자애와도

얘기를 나눠본 기억이 없다. 내 기억력을 완벽하게 믿진 않지만 말이다.

 

걔의 남동생과는 그 후로도 같이 놀았고, 하굣길에 함께 얘기하며 걸어다니기도 했었다.

그런데 불편했던 건, 걔의 남동생과 얘기할 때마저도 마음 한 켠엔 항상

내가 얘의 누나를 때렸는데...’ 하는 생각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걔가 그 사건 후로 제 남동생에게 나를 나쁜 놈이라며 오랫동안 욕하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

 

걔 남동생은 전혀 내색이 없었지만 나로선 좀처럼 그런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7. 그 후로도 오랫동안.

 

.

그리고... 5학년, 6학년을 큰 기억없이 보내고 졸업을 했다.

(자잘한 기억이 왜 없겠는가마는, 지금 순간은 그 애의 기억에 몰입되어

더 이상 다른 기억들을 언급할 힘이 없다.)

 

졸업후 중 2때 하굣길에 그 애를 딱 한 번 보았다.

해운대 전신 전화국앞의 39, 40번 버스 종점의 정류장!...

그 때 나는 같은 번호의 버스를 타고 다니는 친구 두 명과 늘 하굣길을 함께 하곤 했는데...

 

어느 날인가 그 친구 두 명을 뒤로 하고 앞서서 가벼운 걸음으로 정류장의 빈 버스에

헐렁헐렁 올랐는데...

버스의 중간 출입문을 오르는 정면 맞은 편에 꼿꼿하게 앉아있던 여학생이

고개를 휙 돌리는 데 보니 바로 그 애가 아닌가?... , 그 순간 가슴멎음이라니...

 

난 그 애를 본 즉시 몸을 돌려 버스 계단 두 개를 거꾸로 쏜살같이 내려오며

친구들에게 말하길,

, 우리 이 차 말고 다음 차 타고 가자’...라며 걔가 탄 차의 뒤에 대기중이던

빈 차에 놀란 가슴을 누르며 올랐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선 내 이상한 행동을 묻는 두 친구들에게 말을 더듬거리며

국민학교때 내가 때렸던 여자애가 저 차에 타고 있었다라고 설명을 한 기억이 난다.

 

살아가다 사람이 몹시 놀라면 체내의 단백질량이 순간적으로 급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결과 다리가 풀리기도 하고, 몸에 힘이 쭉 빠지기도 하는데,

그 애와 전혀 얘기치않은 장소에서 눈이 마주쳤던 그 때의 내 체내 단백질 소모량은

과연 얼마쯤 되었을까?...

 

.

그리고... 그 후로도 참 오랫동안을 난 그 애에게 죄를 진 기분으로 살았다.

국민학교 4학년!...

그 어릴 때의 소싯적 주먹질 한 번이 그렇게 죄스러우면 사람이 어떻게 사냐고?...

 

아니!... 다른 사람들은 이해가 안될 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겐 정말 그랬다.

 

난 국민학교 6년 동안 누구와 싸워본 일이 내 기억엔 존재하지 않는다.

6년 동안 난 누구를 때려본 기억 또한 남아있지 않다.

3년간도 마찬가지였고 고 3년간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난 숫기없었고 숙맥이었으며 싸움과는 거리가 먼 애였던 것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내가 주먹질한 애가 그 애였으니...

12년 동안 유일하게 내가 때려본 애는 그 애였고,

그 애는 더욱이 남자도 아닌 여자 애였으며, 그 애는 내게 맞고 쪼그려앉아 울기까지 했다.

그런 이유로 인해, 걔는 나도 모르게 내 유년의 기억속에서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애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애만 생각하면 항상 미안하고 죄스럽고,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

 

열 아홉인지 스무살 때, 걔 남동생이 수원대 올라간다며 친구들 몇이 모여 술을 한 잔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도 난 미안한 마음에 형제인 그 애 누나의 안부를 물어보지 못했다.

걔 남동생에게 부르기를 늘상 처남이니 어쩌니 하며 놀던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친구의 묻는 말에 걔 남동생이 몇마디하는 말을 그냥 수동적으로만 듣고 있었을 뿐!...

 

철이 제법 든 20대때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쳐서 서로를 알아본다 했더라도,

지금 생각으로는 내 오랜 죄책감에 눌려 그냥 말없이 자리를 피해 지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수십년을 사회생활하며 국민학교 시절과 친구들 얼굴을 의도치 않게 떠올려 추억할 때에도,

마지막은 항상 내가 주먹질했던 그 애의 기억으로 종료되곤 했다.

 

그리고보면 난 참으로 오랜 시간을,

그 애와 관련된 유년기의 불편한 기억들을 머리 한켠에 힘겹게 간직해 왔던 것이다.

그 애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는가?...

아니!... 나 자신 스스로 그런 기억의 감방에 갇혀있었던 것이다.

 

 

.

살면서... 이같은 기억은 우리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정작 상대는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을, 성장기의 아주 작은 사건들.

어른들의 어떤 말... 친구들과의 어떤 일들.... 선생님께 들었던 꾸중이나 칭찬 한마디.

어느 한 때, 어느 한 순간의 사소한 한마디나 사건들이, 여전히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잠재의식속에 오래도록 남아 사회생활시 강박관념으로 작용되고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의도적이지 않긴 하지만, 나로 인한 불편한 기억을 누가 오랫동안 해왔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나로 인해 오랜 상처나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연애시절 헤어지자고 말한 그녀 또는 그 남자만 떠올려 본다고 하더라도,

헤어진 후 그들 마음속에는 우리가 별 생각없이 홧김에 던진 단호한 이별사 한마디가

아직까지 비수로 남아있지 말란 법은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우린 지금까지 우리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죄를 얼마나 지으며

살아온 걸까?...

살아가는 매 순간의 행위가 죄를 짓거나 복을 짓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우리 삶의 매순간은 참으로 엄중하고도 무서운 것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유년의 유쾌하지 못한 기억 하나를 친구들 앞에 내려놓는다.

그럼으로써 나도 유쾌하지 못한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사자인 그 애의 기억에는 그 사건과 내가 어떤 기억으로 점철되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각자가 기억하고 바라보는 사건의 전말, 청춘시기 연인들이 훗날 기억하는 사건의 진실은

쌍방간에 아주 다른 해석의 차이가 존재하곤 하니까...

 

하지만 글을 쓰는 동안 난 최대한의 기억력을 동원하여 사건을 서술하려 노력했으며,

나 자신에게도 고해성사하는 솔직함으로 써내려 왔으므로 부끄러움은 없다.

기억의 진술에 있어서 솔직해야지만, 나 스스로 유년기의 상처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각나는 옛속담 하나!...

맞은 놈은 두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편하게 못잔다’...

물론 요즘 세상에선 맞은 놈도 맞은 놈 나름이고 때린 놈도 때린 놈 나름이긴 하지만,

그 애는 그 후로 오랫동안 편하게 잘 잤을까?...

 

수십년동안 입 안쪽에서 걸거적거리며,

과거를 추억할 때마다 날카롭게 튀어나오곤 했던 사랑니 한 개를 빼낸 듯한 기분이다.

 

그 애가 부디 건강하게 잘 살고 있기를...

 

 

PS. 1.

친구들도 마음속에서 꺼내놓아야 할 무거운 돌이 있다면,

당사자앞에 솔직하게 꺼내어 놓으며 편하게 살어라.

친구들이든 사회생활하며 알게된 누구든간에 말이다.

그러면 다음 생에서 서로가 만나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요,

어떤 형식으로든 풀고가지 않는다면 그게 바로 원죄요 이 될 것이니라.

, 혹시 부처나 예수님?... ^^

 

나도 아직은 풀어야 할 게 산처럼 많이 남은 사람이긴 하다.

아무쪼록 열심히 살며 서로에게 복을 지을 수 있기를...

 

PS 2.

제법 긴 글을 쓰게된 이유는, 이쯤에서 내 유년기의 기억들을

어설프게나마 대략이라도 한 번 갈무리해 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언제 어느 때 갑작스런 기억의 퇴보가 발생할지 장담할 수 없는 게 우리 중년들의 인생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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