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전에 구입한 '인터메조' 캐주얼 바지가
양쪽 엉덩이 두군데 모두 올이 나가서 너덜너덜해 진 것을 발견한 것은
어제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온 뒤였다.
비슷한 색상의 팬티를 입고 나갔길래 망정이지,
파란 바지안에 하얀 색 팬티를 입고나갔으면 큰일날 뻔 했다.
다른 바지가 있어도 이 바지만큼 편하지가 않아서
봄, 가을에는 유독 이 바지를 많이 입었었는데...
내 흔들리는 삶은 이 바지와 함께 그동안 여섯번의 이사를 했다.
이사할 때마다 수많은 가재도구를 버렸으며, 옷은 부지기수로 버렸는데도
이 바지가 아직까지 내 곁에 있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내 부실한 하반신을 넉넉한 넓이로 감싸온 14년의 세월.
그 시간속에는 나에게도 참으로 슬픈 일이 많았구나.
널 입는 동안 자주 세탁소에 맡겨 드라이크리닝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널 입고 향기로운 카페의 부드러운 소파에 앉았던 시간보다는,
내 슬픔으로 인해서 그냥 널 후줄근하게 입고 바다와 들판으로
쏘다니며 차가운 바위에 앉았던 시간이 많아서 미안하다.
절벽처럼 부실한 내 엉덩이로 인해 그 부분의 네 곡선을 못살려준 것도 미안하다.
너와 맞닿아있는 오줌 질금거린 팬티도 자주 안갈아입어서 미안하다.
번화가 매장 쇼윈도우를 지나치며 너와 우연히 마주친 14년전의 어느 가을날,
나는 네가 걸려있는 가게안으로 결코 들어서지 말았어야 했다.
사실 그 가을날 난 번화가를 바람맞으며 걷다가 지쳐서,
내마음을 달래보려고 널 충동구매했단다.
어쩌면 너와 만난 순간부터 난 성실하지 못했구나.
그렇게 잘못된 만남으로 시작되었으니, 네가 어찌 행복했겠니?
지금 이별의 순간, 여느때처럼 잘못한 점만 떠올라 가슴을 파고 든다.
너를 떠나보내며 너와 함께한 14년간의 수많은 일들을 추억한다.
너를 떠나보내며 그 오랜 시간 동안의 슬픈 기억들도 함께 떠나보낸다.
파란 '인터메조' 바지야!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그리고 정말 미안해. 안녕!...
PS. 한낮 오래된 '물건'과 헤어짐이 이렇게 마음 아플진대,
오랜 세월 정든 '인간'과의 헤어짐은 더 이상 말해 무엇하리!...
만남과 헤어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앞으로 우린 얼마나 많은
상처를 더 입어야 하는걸까?...
사랑의 상처는!... 너무나 무섭고 끔찍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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