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풍경

나이를 먹는다는 것

라즈니쉬 2005. 9. 24. 01:29

어릴 적 누나 친구들이 집에 놀러오면,
돌아갈 때까지 이불 뒤집어쓰고 자는 척 했다.
(안 자면서 자는 척 한다는 것! 이거 이불밑에서 실제로 해 보면 엄청 힘든거다)
왜? 그냥 부끄러워서.

고교 때 단칸방에 살던 친한 친구집에 그렇게 자주 놀러갔어도,
친구의 누나 얼굴을 기억못한다.
내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 적이 없으므로.
왜? 그냥 부끄러워서.

동네어귀 슈퍼에 라면 하나 사러 나갈때도,
무릎나온 추리닝을 벗고, 기성복 바지를 입고 나갔다. 
왜? 골목 어귀의 모든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서.
(이 때는 왜 스스로를, 모두가 주목하는 요주의 인물이라고 착각한걸까?
 별로 잘나지도 않았으면서 말이다. 어릴 땐 한마디로 분수를 모르는건가?)

부끄러움을 잘 타는 성격을 고쳐보고자, 내 딴에는 노력을 안해본 건 아니다.

고등학교가 시내의 번화가에 위치했던 관계로,
하교길에 정류소에 서서 집 방향의 버스를 타려면,
수없이 많은 버스들이 내 눈앞에 멈춰서곤 지나가곤 했다.

버스가 정차했다가 다시 출발하는데 소요시간은 약 30초 내지 1분.
그 시간동안 난 나를 쳐다보는 버스안의 여학생들 눈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아무 말없이, 한 여학생을 타겟으로 지목해서,
버스가 서 있는 동안 그냥 빤히 쳐다보는 것이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에 그 여학생이 먼저 눈을 돌리면...
난 "이겼다"라고 맘속으로 외쳤다.
약 15초간을 서로 응시하다가 여학생이 끝까지 버티며 내 눈을 응시하면...
난 항상 처참하게 무너지곤 했다. 웬 여학생들이 그렇게 강적인지...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볼 정도로 내가 잘 생긴 건 절대 아닌데...)

여학생과의 눈싸움에서 패배한 날은,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내 침울했다.
나의 심약함을 "그래! 난 본래 여자로 태어났어야 했던거야."라며
애꿎은 울 엄마를 탓해 보기도 하며. 

그랬던 내가!

참 많이도 발전했다. 요즘 내 자신을 돌아보면.
번화가 백화점 사거리에 민소매 나시 차림으로 활보를 하곤 하니.
(오해하지 마라! 나, 백화점 사거리의 수박이나 아이스케키 장사는 아니다)

민소매 차림이 어떠냐고?
양쪽 어깨에 대나무 젓가락 두 개 붙이고 다니는 몸짱 봤는가?
하긴 이런 실용적 패션을 취함은, 칠순이 가까워 오는 나이탓이기도 하다.

인간이 "나이를 먹어간다"함은, 또 다른 말로 "부끄러움을 알아간다"는 말일 듯한데,
어케 된건지 나를 비롯한 일부의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감과 비례하여, 부끄러움도 먹어치워 없애가는 것 같다.

소싯적!
일상 곳곳에서 그렇게나 소름끼치도록 마구 돋아나던 부끄러움, 수줍음의 편린들.
약삭빠르게 살아오느라 필요했던 처세술을 익힘에 따라...
그런 편린들은 우리들의 두꺼운 얼굴피부 밑으로 겹겹이 감춰져 있는 건 아닌지. 

나이를 먹어감은 부끄러움을 알아가는 것.

나이를 먹어감은 동시에 부끄러움을 먹어치워 없애가는 것.

오늘!
그 소싯적의 가슴 두근대던, 살떨리던 수줍음의 편린들을 하나하나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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