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풍경

허용과 포용 (자아의 완전한 개방)

라즈니쉬 2010. 1. 19. 03:04

1. 깨달음
깨달음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깨달음을 찾아나서는 것이 깨달음을 얻는 본질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제 스스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아니 찾아 온다기 보다는 언제나 깨달음 아닌 순간이 없고, 참된 자성이 아닌 적이 없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행복이 나를 찾아오는 것이지 내가 행복을 찾아가는 게 아닙니다.

내가 지금 불행하기 때문에 언젠가 있을 행복을 찾아 나서겠다, 달려가겠다,
그게 행복의 본질이 아니라는 겁니다. 

2. 수행
행이라는 것은 사실은 나를 완전히 여는 작업입니다.
가두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나를 활짝 열어두는 작업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깨달음을 얻고자 애쓰고 노력하는 일이 아니라 깨달음이 들어올 수 있도록,
참된 진리가 들어올 수 있도록 나를 활짝 열어두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깨달음은 매 순간순간 나에게로 오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닫힌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방어벽을 딱 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 들어오지 못하고 반사되어 나가버립니다.
진리란 언제 어디서든 마음만 활짝 열고 보면 진리 아닌 것이 없고,
언제 어느때나 우리와 함께 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아니 함께 하고 있었다기 보다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은 그대로 진리 그 자체입니다.
다만 내가 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외면하고 있는 거예요.

3. 보는 것은 눈이 아니라, 마음이다.
우리 눈도 어때요?
무엇을 찾으려고 방에 들어갔는데 분명히 그 방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못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명히 있었지만 못 찾아요. 그것이 그 방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못 본 것이었을 뿐입니다.
여기 다양한 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 다양한 꽃들이 눈에 보이거든요. 
꽃들이 다양하게 많아서 좋아,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요.
그런데 꽃을 향해서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은 전혀 꽃이 눈에 보이질 않죠.
꽃은 전혀 나에게 들어오지 않습니다.
꽃은 항상 지천에 열려 있지만 그 꽃이 나에게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그 꽃들은 꽃을 향해 마음을 열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있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꽃에 관심이 없다가 어느 날 꽃을 향해서 마음의 문을 염과 동시에,
아름다운 꽃들이 신비롭게 막 들어오기 시작해요.
아름다움과 신비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마음의 문을 열고 그것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정리 안 된 쓸모 없는 땅이거나, 가치 없는 숲일 뿐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열기 시작하면서,
혹은 몇몇 마음을 연 사람들에게만 그 가치는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4. 지금 현재가 바로 지복의 시간이다.
우리가 마음속에서 마음을 활짝 열어 놓지 못하면
이 세상에 있는 진리가 나에게 들어오질 않습니다.
여러분들! 이것을 분명하게 좀 들으셨으면 좋겠어요.
항상 깨달음은 나에게 오고 있다.
지금 이순간도 모든 진리, 모든 자유로움, 모든 행복은 항상 오고 있습니다.
언제 왔냐면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오고 있다.
아니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마음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막아서는 내 마음의 방어벽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5. 내가 싫어하는 것에, 내 성숙의 열쇠가 있다.
보통 우리는 무엇을 보더라도,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중에 나에게 필요한 것만 쏙쏙 뽑아서 선택해서 받아들이는데 익숙합니다.
우리 마음은 자동적으로 좋고 나쁜 것, 적과 아군을 구분해서
어느 한쪽만 받아들이고
다른 쪽은 거부합니다.
사람들을 만나도 나에게 이익 되는 사람, 도움 되는 사람,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좋아하면서 사귐을 유지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오면 이렇게 밀쳐내기 시작합니다.
직장에서의 일들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일이 오더라도 내 몫이려니 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이러이러한 일은 내가 잘하니까 받아들이려하고, 이러이러한 일은 딱 거부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거부하려고 애썼던 그 일속에 나를 일깨워줄 수 있는 엄청나게 신비로운,
비밀스러운 이치가 담겨 있는 걸 우리는 모르고 있단 말입니다.
바로 그 생소한 일을 통해 우주는 나에게 아름다운 삶의 이치나
또 다른 새로운 진리에의 가능성을 보내주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례히 그렇듯, 하던대로 거부하는데 익숙합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더라도 마음에 불편함과 벽을 가진 채 받아들이니까
그것이 온전하게 수용하는 것이 아니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삶은 새로운 변화나 어떤 각성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6. 모든 가능성을 향해 나 자신을 활짝 열어라.
예를 들어 직장에서 자주 인사이동을 해야 하는 분들 같은 경우에 ‘이런 곳은 가고 싶고,
저런 곳은 안 갔으면 좋겠다’ 하고 방어벽을 쳐 놓습니다.
어느 한 쪽에만 치우친 집착을 한단 말이지요.
내 삶이 어떻게 펼쳐지든, 내가 어느 곳으로 가든,
바로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몫이라고 생각하고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니다.
모든 가능성을 향해 나를 활짝 열어놓치 못한다는 거예요.
어디를 가도 좋고 무슨 일이 있어도 좋다, 시골을 가도 좋고 도시에 가도 좋다,
서울을 가도 좋고, 전라도를 가도 좋고 어디를 가도 좋다,
어디를 가든, 바로 그곳이 "이 우주법계가 지혜와 자비로움으로써 나를 돕기 위해
나를 보내주는 곳이구나"... 하고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생각 자체가 좁아지고, 내 삶의 엄청난 가능성이 한껏 축소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그곳이 바로 내가 완전히 받아들여야 할 곳이구나 그렇게 생각을 못한단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삶을 대상으로 마음속에서 딱 벽을 칩니다.
이러이러한 곳에 가고 싶다 하고 벽을 치니까 어때요? 거기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 못한 곳에 갔을 때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저 친구는 나보다 뭐가 잘나서 저 좋은 곳에 보내주고, 나는 여길 보내 줬느냐?’ 하고
그냥 시비거리가 생겨나고, 힘들고, 괴로운 일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거다 말이죠.
나를 완전히 열어 놓는다면 어디가도 좋다, 어떤 일이 나에게 멀어져도 좋고,
어떤 인연을 만나도 좋고, 어떤 사람을 만나도 좋다,
설령 어떤 직장을 갔는데 작장 상사가 너무 나쁜 사람이고 너무 사람을 괴롭힌다 할지라도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겁니다.

7.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 내게 다가오는 이유
그것은 왜 그런 일이 왔느냐?
나에게 어떤 영적인 각성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나에게 어떠한 깨달음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혹은 나에게 업장소멸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 우주법계가 자비로움으로써
계획해 낸 일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를 대장부라는 말로 많이 표현하곤 하는데요,
이 정도 너른 마음, 활짝 열려서 꽉 막혀 있지 않은 마음,
무엇이든 오너라 하고 당당하게 삶을 받아들이는 이 정도가 되어야 대장부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방어막을 침으로써 허용할 것과 허용하지 못할 것,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 이것을 딱 분명하게 나눠 놓습니다.
내가 받아들일 것, 받아들이지 못할 것을 둘로 나눠 놓고
그중에 어느 한쪽만을 선택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깨어남이 자꾸 더뎌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업장소멸의 가능성이 자꾸 뒤로 미뤄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한 완전한 깨달음, 열려있음, 행복, 자유로움 이런 것을
스스로 걷어차고 있다 이 말입니다.
다른 게 감옥이 아닙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게 감옥이 아니라 이렇게 내가 방어막을 치고서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내가 친 방어막에 내 스스로 갇혀 있는 것!... 그게 바로 존재의 감옥이고, 의식의 감옥입니다.

8. 세상의 모든 것은 자신의 깨달음을 위한 방편
다음의 이 명제를 분명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삶은 항상 나를 일깨워 주기 위한 일만 벌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펼쳐지는 모든 일, 모든 사건, 여러분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여러분을 완전한 각성으로 이끌기 위해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끌기 위해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저 나를 시험해보기 위해서 이런 일을 벌이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 모든 신의 시험은 사실 그것 자체로써 나를 위한 신의 사랑입니다.
이 사람이 나를 참으로 믿는지 시험해 보자 하고 신께서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
벌이는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지 선택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나에게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빛이 못 들어오게 방어벽을 쳐 놓음으로써
스스로를 어둠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입니다.

9. 스스로 삶과 다투며 투쟁하지 말라.
우리를 가로 막는 것은,
세상의 많은 어두운 요소들, 문제들, 경제적인 궁핍 내지는 내 능력의 부재,
이런 것이 어두움처럼 느껴져서 나를 어둡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빛이 한없이 들어 올 수 있는데 그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어벽을 딱 치고 있음으로써
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놓고서 스스로 어둡다며
‘삶은 왜 이리 어두우냐? 삶은 왜 이렇게 힘들고 답답한 것이냐?’ 라고 삶과 다투고
투쟁하고 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가 나를 찾도록 완전히 나를 진리에 내맡기고 포용하라 겁니다.

10. 내게 주어진 삶이 바로 진리
그러면 무엇이 진리냐?
일상이 바로 진리다, 나에게 주어진 삶이 바로 진리라는 겁니다.
사소한 것이야말로 가장 신비로운 것이고, 가장 경이로운 겁니다.
가장 사소한 것 속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 있다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보려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나를 완전히 활짝 열어둘 수 있어야 된다 하는 소립니다.

11. 내게 일어나는 일들은, 내게 꼭 필요하기 때문에.
일상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은 정확히 나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은 정확히 여러분이 받아야 될 바로 그 사람인 겁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건, 사고, 일, 경계, 사람...
이 모든 것들은 진리의 세계, 법계로 부터 아주 치밀하게 계획된,
그것도 우리를 이끌어 주고, 일깨워 주고, 우리를 깨닫게 해줄 목적을 가지고
우리에게 등장한 어떤 진리의 소식이요 부처님의 큰 자비의 계획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진리가 삶 속에 등장하는 방식입니다.
아주 일상적인, 지극히 평범한 우리의 일상이 바로 진리의 나툼이다 이 말입니다.
그 모든 사소한 일상의 경험이야말로 나에게 깨달음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진리의 계획입니다.
하루 하루 매 순간순간 내가 경험하고 있는 바로 그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기적이고 신비이며 진리의 소식입니다. 우리를 깨어남으로 이끄는 최적의 공부인 것입니다.

12. 삶이란, 깨달음을 위한 여행
일상의 삶이야말로 깨어남을 향한 장대한 여행인 것입니다.
업의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 안에 오래도록 깊이깊이 저장되어 있던 어떤 업장들이
오랜 기다림 끝에 모처럼의 풀려날 최적의 기회를 맞아 가지고 나에게 찾아 온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건이든 사고든,
내 앞에 펼쳐지는 모든 일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줍니다.
아무리 평범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일지라도 그것은 더 깊은 차원에서부터
어떤 특정한 깨우침을 주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고, 우리를 평화와 자유로움으로 이끌어 주는 상황들이란 말입니다.

13. 세상앞에 자신을 완전히 열어두라.
그런데 그런 일상의 신비를 맞는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삶이라는 평범함 뒤에 감춰진 경이로운 순간을 맞이하는 우리 마음가짐은 어떠냐 말이지요?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죠. 전혀 소중하게 여기거나, 새롭게, 신비롭게 여기지를 않습니다.
매일 매일이 그저 그렇게 반복되는 진부한 일상일 뿐이란 말입니다.

세상이라는 것에, 삶 그 자체에 완전히 나를 열어두지 못합니다.
그 모든 삶을 분별하고 해석하고 차별하고 선택함으로써 통째로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내가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고, 특정 대상에만 나를 열어 보입니다.
사람을 만나도 선택적으로 만나고, 어떤 일을 만나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선택적으로 만납니다.
삶이라는 진리가 나에게 주는 선물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려면,

삶 그 너머의 깊이에 있는 참된 의미를 깨닫고자 한다면,
나에게 주어진 그 모든 것들을 취사선택하거나 나누지 않고
무엇이든 받아들여 볼 수 있어야 합니다.

14. 내가 열리는 순간, 진리는 내 안으로 들어온다.
누가 책을 한 권 선물해 주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휘익 대충 한 번 훑어 보고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주제가 아니야’ 하고는 툭 처박아 놓습니다.
그 안에 얼마나 엄청난 깨달음이 담겨있는 책인지도 모른 채 그냥 책장에 꽂혀서는
몇 년이고 처박혀 있기만 합니다.
그렇게 책에 대한 방어막을 쳐놓은 그 사람에게는 그 책이 들어올 수 없어요.
그 가르침이 들어 올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내 존재가 깨어나게 되면, 어떤 삶의 부분에 대해서 열려 있게 되면
그때부터 그 진리나 가르침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집안에 푹 처박아 놓았던 그 책이 이렇게 보배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깨닫기 시작합니다.

15. 세상 모든 것에 나를 완전히 허용하면, 나는 진리가 되고 부처가 된다.
잘 따라오고 있나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계신 건가요?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들이 이중에 많은 분들에게는 아마도
별 의미 없이 다가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뭔 이야기를 하는 건가?’ 하고 내가 딱 닫아걸고 있으면
그 어떤 것도 들어 올 수가 없거든요. 

스스로 닫아 건 사람은 결코 가르침을 흡수하지 못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부처가 있더라도 스스로를 닫아거는 사람에게는
그 부처도 아무런 선지식으로서의 역할을 못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해, 삶을 향해 나를 완전히 열어둔 사람에게는
만나는 모든 사건, 모든 일들, 모든 사람, 모든 사소한 일이라도
그것이 바로 나를 일깨워 주기 위한 깨우침의 일이 됩니다.
그래서 내 삶에서 등장하는 그 어떤 것도 거부할 필요가 없단 말이예요.
그 모든 일들이 나에게 흘러와서 흘러가도록 내버려둬야 합니다.
자꾸 가둬두거나 못 들어오게 틀어막을 필요가 없어요.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그냥 완전히 나를 허용하는 겁니다.
그럼 그 일이 진리의 일이 되고 부처의 일이 된다는 겁니다.

16. 방어벽을 없애는 순간, 자유로운 삶을 만난다.
그래서 매 순간순간 우리에게 펼쳐지는 모든 일들은,
아까 제가 말씀 드린 방어벽을 없애주기 위한 목적으로 나에게 찾아옵니다.
만약에 어떤 새로운 일에 대해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있는 하나의 방어벽에 대해 결코 무너뜨릴 수 없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사람들은 방어벽에 걸리지 않는 것들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잖아요.
그런데 뭔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있잖습니까?
방어벽에 걸리는 것, 사상적으로도 그렇고 뭐든 내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뭔가 나한테 와서 부딪치고, 내 마음에 흔적을 남기고, 내 마음에 화를 남기거나,
내 마음에 짜증을 남기거나, 이거는 내가 좀 거부하고 싶거나 이런 마음이 올라오는 것,
사실은 그것이야 말로 내 방어벽을 깨주기 위한 목적으로,
내 방어벽을 깨 줌으로써 나를 영적으로 성숙시키고,
나에게 진리가 파도쳐 들어오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띠고 이 자리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것들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원하지 않았던 것이라도 나에게 오는 것,
나에게 오는 모든 일들을 대상으로 나를 완전히 열어두게 되었을 때...
그 모든 것이 파도쳐 들어오고 그랬을 때...
내 안에 내가 꽉 울타리 쳐놨던 방어벽들이
하나 둘씩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어떤 경지에서도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 말입니다.
어떤 방어벽도 없으니까 모든 것이 자유롭게 오고 간단 말입니다. 어디에도 걸릴 것이 없어요.
이 자리가 바로 무애도인의 자리라고 했어요.
그랬을 때 비로소 아까 말했던 다양한 예를 들었던 방어벽들, 그런 어떤 크고 작은 관념,
관념의 틀, 방어벽 그것에서 내가 놓여날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17. 깨어있는 삶

어떤 틀에 잡힌 관념에 빠져가지고 거기에서 괴로워하는 일들이 없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그 어디에도 갇혀 있지 않은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방어벽 너머에 자유로움이 있다,
내가 쳐 놓은 그 방어벽 너머에 깨달음이 있고 빛이 있다 하는 겁니다.
어디 가서 깨달음을 찾으려고, 진리를 찾으려고, 행복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고,
다만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진리가 더 이상 거부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나에게 파도쳐 들어올 수 있도록 다만 나를 열어두고 허용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바로 영적인 삶이고 깨어서 사는 삶인 것입니다.

18. 나를 완전히 열고 허용하면, 내 인생은 깨어남과 자유로움이 시작된다.
절에서
수행하는 것만 영적이고 수행자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세속적인 나에게 욕하는 사람,
나에게 욕하는 상황이 바로 아주 영적인 대상인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이 녀석이 나한테 욕했다고 시비를 붙이고 싸움을 걸 때
그것이 세속적인 분쟁이 되는 것이고 중생이 되는 겁니다.
남들이 나에게 욕을 했을 때 그 마음을 관찰하면서 내 안에서 올라오는 화를 들여다보고,
그 욕하는 것을 그냥 허용하는 겁니다.
왜 이 우주에서 어떤 한 사람이 나에게 욕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까? 그건 문제가 아니지요.
누구도 나에게 욕 할 수 있어요. 세상을 살다보면 그런 일은 당연히 있는 거예요.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닌 겁니다. 오히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그걸 허용해야 됩니다.
그것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닫아 걸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걸 허용하고 났을 때 비로소 그 욕이 나에게 와서
흔적을 남기고, 화를 남기고, 두려움을 남기지 않게 됩니다.
욕 얻어먹기 싫어서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두려움에 못 하게 되는 일이 없어집니다. 
종교가 화합을 해야 된다, 불교든, 기독교든, 어떤 종교든 그 본질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정말 불교도 옳고, 기독교나 천주교도 옳을 수도 있고, 모든 종교, 모든 사상이 다 옳을 수 있다,
본질에서는 다르지 않다, 우리가 함께 화합을 하고 아름다운 것을 지켜 나가야 됩니다.
나를 완전히 열어두고 좋은 일에 대해서도, 나쁜 일에 대해서도 나에게 오는 모든 것에 대해서
나를 열어두고 허용하게 됐을 때 내 인생은 엄청난 깨어남이 시작되고,
내 인생에 큰 자유로움이 시작됩니다.

19. 아상이 깨어질 때 오는 자아상실감을 받아들여라.
단, 나를 완전히 오픈했을 때, 모든 것을 받아 들였을 때,
어떤 일종의 자아상실감이라든가 일종의 내가 무너지는 것 같은,
내가 좌절되는 것 같은 이런 것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기 보호막을 치는 것,
방어막을 치는 것이 내 인생의 최고의 목적이라고 알고 살아오면서 엄청난 방어막을 쳤고,
그 방어막이 바로 나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방어막이 바로 난데 내가 바로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되니까 우리는 일순간 괴로워 지는 거예요.
그러나 그 괴로움을 허용하라는 말입니다.

그 자아상실감은 바로 아상이 깨지는데서 오는,
바로 무아(無我)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한 아상이 타파되는 아주 좋은 경험입니다.
아주 즐거운 경험이다 이 말입니다.
그 정도 쯤이야 충분히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수행자가 할 일입니다.
그러니까 내 방어벽이 좀 깨짐으로서 내 존재가 조금 상실감이 오더라도 그것은 좋은 소식이지요.
그것만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나를 완전히 허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행복, 깨달음, 진리, 자유로움, 우리 삶의 걸림 없는 삶 이런 것들은요
지금 이 자리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한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문제도 더 이상 문제가 아닙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지금 여기’에서의 문제거든요.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열어두고 받아들이는 것이지 그것은 과거나 미래가 하는 일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나를 열어두고 삶을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바로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는,

분별 없이 매 순간순간을 관하며 사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20. 자신의 평상심이 이탈하는 경계를 만나면, 포용하고 허용하라.
그 순간 진리는, 내 안으로 파도치며 들어온다.

바로 이 자리에 있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활짝 열고 삶을 허용할 때 직장에서 진급할까? 안할까?
뭐 돈을 벌 수 있을까? 없을까? 이번 사업이 잘될까? 못될까?
남편하고 싸웠는데 맘 풀어졌을까? 안 풀어 졌을까?
자식이 공부를 잘할까? 못할까?
내가 미래에 잘 살 수 있을까? 없을까?
1년 뒤에 있을 수능시험 결과가 좋을까? 안 좋을까? 그 어떤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죠.
그것은 실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생각이 만들어 냈고,
이 세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 사람들이 만들어낸 생각의 구조물일 뿐이에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일 뿐이고요. 허상이란 말입니다. 허상!...
수많은 대학교에 가면 연구논문들 있잖아요? 그 연구논문이 그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 또한 상당수가 생각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 아니겠어요.
제가 그것 자체를 그냥 묵살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깨어 있는 순간 그 모든 것도 다 공허한 것이란 말입니다.
오직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 느끼고 있는 지금,
듣고 있는 이것만이 실재입니다.
이것!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이 자리에 깨어있을 수 있는 것, 이 자리로 가져다주는 것!
그것만이 실재입니다.
내가 온전히 지금 이 자리에 있을 때 모든 걸 포용하게 되고,
내가 완전히 관하고 있을 때 모든 것을 허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만들어 놓은 그 방어벽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한 번 살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시고, 하여간 내 인생에서 뭔가 껄끄러운 평상심에서 벗어나는
무언가의 경계가 나타난다면 ‘아 이게 바로 나를 붙잡는 방어벽이구나.
이게 바로 나의 행복과 자유로움과 깨달음을 방해하는 방어벽이구나’ 하고 바로 알아차리고
그것을 포용하시길 바랍니다. 나한테 오는 모든 것을 완전히 포용하시기 바랍니다.
허용하고 받아들이세요. 그러면 진리는 나에게 엄청난 파동으로서 파도쳐 들어올 것입니다.
그 파도쳐 들어오는 것을 내가 막지만 않으면 된다는 겁니다.

- "목탁소리" 발췌글 / '내사랑 영아'님 블로그에서 가져옴 - 

PS.
1. 원문에서 아주 미미한 일부 삭제, 수정이 있었음.
2. 1~20항간 나눔에 대해 : 하나로 연결된 글이었으나, 읽는 이의 편의를 위해 제 임의로 나누었음. 
3. 항의 제목에 대해 : 제 임의로 내용을 요약해 붙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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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 감상)

"내게 오는 모든 고통은, 나의 성숙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닥쳐온다."...

살아오며 언제부턴가 좀 안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위의 문구를 내 일상에서 문득문득 떠올리곤 했다.
오래 전 내가 읽어왔던 다수의 불서나 명상서적에서 공통적으로 쓰여져있던 말이라서,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랜 세월동안 가슴에 새겨져 있었던 것 같다.

위의 문구는,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통의 이유를 설명할 때, 가장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해답이 되어준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위의 문구에 더해서...
오늘 접한 '모든 것에 자신을 열고 허용하는 순간, 진리는 내 안으로 들어온다'... 라는 말은,

내 의식을 한단계 더 확장시켜주는 아주 소중한 가르침이라 느껴진다.

'고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은 어찌보면 좀 '소극적 자세'라고 볼 때,
'모든 것을 허용하라'는 말은 매우 '적극적 자세'로 볼 수가 있다.

우리가 삶을 대하는 자세!...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세상사 모든 일에 소극적 태도로 응한다면, 삶에 자신이 끌려가는 것처럼 힘들게만 느껴질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매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발전적 태도로 응한다면,
삶은 자신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라 느껴질테고
힘든 삶의 와중에서도 보람과 재미와 즐거움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삶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일수록, 우리는 삶의 자세를 '적극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어보인다.
나 자신부터!...

어떤 사람들에겐 "삶이란, 희망이란 단어에 속아넘어가는 과정"...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속아넘어가는 과정인 줄 뻔히 알면서도 '희망'을 품지 않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우리가 계속 살아가기 위해선 말이다. 

위의 스님 법문에 비춰보면,
" '희망'이란 것은 어쩌면 당신에게 오지 않을지도 모를 미래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그건 허상이다" ... 라는 말이 되려나?...

하긴!... '지금 이 순간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깨어있는 사람들에겐,
'오늘보다는 그래도 내일이 낫겟지'...라는 미래의 막연한 '희망'이란 단어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내 손에 무엇이 쥐어질지만을 계산치 말고, 
다가오는 모든 것에 마음을 열고, 순간에 살도록 노력하자!...
그것이 깨어있는 삶이고, 깨달음이다.

PS.
'진정한 앎은 행함'이라 했는데...
지금 이 순간의 깨달음을 나는 과연 어떻게 일상에서 체화시켜 나갈것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법문처럼 행하지 못하면 '중생'으로 살 거고, 
'지행합일'의 삶을 살면 '무애도인'으로 살 거고. 
참, 고민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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