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한식을 몇일 앞두고
부모님의 산소와 큰아버지 산소에 성묘갔다가,
큰아버지 묘의 비석 뒷면 내용을 기록해두고 싶어서 메모해 오다.
메모쪽지를 책상 한 켠에 방치해오다가
20여일이 지난 오늘에서야 몇 자 정리해 둔다.
츨생 : 1925년생
사망 : 1972년 음력 8. 11일 (48세) - 姪이 국민학교 4학년때.
처 : 우봉순
묘지 : 부산 팔송 영락공원 3묘원 21구역 21-24호
<그의 일생>
* 일제 강제징집으로 끌려갔다 도망옴.
* 자손없음.
처음엔 큰어머니의 가임능력을 의심했으나
병원 검사후 큰아버지의 문제라는 게 뒤늦게 밝혀짐.
* 김해 대저면에서 벼농사를 비롯해, 토마토 등 각종 계절작물 농사 지음.
* 김해에서 장전동으로 이사후 사망.
(1970년도 전후하여 장전동 3층 건물 구입했으며,
건물 옆 기와집에 큰어머니의 친오빠 거주.
건물 구입시 기와주택도 같이 구입해서 오빠를 데려와 살게했는지,
아니면 오빠는 원래부터 그 기와주택에 살았는지는 정확치 않지만,
큰아버지의 사망후 동생(아버지)으로부터의 유산침탈(?)을 우려해서
큰어머니가 친오빠를 지근거리에 두고 의지하고 있을 의도였음은 분명함.)
<기억>
* 김해에서 암판정후 장전동으로 이사한 것으로 기억.
지금 생각컨대, 그 때부터 큰어머니는 재산보전차 자신의 친오빠 주거지 근처로 이사한 것으로 생각됨.
* 간암 발병 당시, 부산 초량 성분도 병원에 아버지와 함께 위문갔던 기억.
* 어릴 적 김해의 큰아버지 집에서 보름 전후씩 놀곤 했던 기억이 있는데,
큰아버지댁의 자손없음으로 부모님이 잠시 잠시 보낸 것으로 기억하지만,
부산 수정동 거주 당시 어머니의 생계활동으로 나를 보살필 시간적 여력이 없었던 이유도 있었을 것임.
* 큰 아버지가 밭에 나갈 때 큰어머니에게 10원을 주며
'애 과자 사줘라'...하고 나가면 큰어머니는 항상 1원어치 과자밖에 안사줬음.
* 큰아버지 집 바로곁에 큰아버지 집의 일만 도와주며 생계를 꾸려가던
아저씨가 한 명 있었음. 성씨는 장씨로 기억하며 인상이 우직해 보였고 덩치도 좋았음.
* 그 아저씨와 큰아버지가 둑길 넘어 밭에서 토마토를 지게로 져다 날라와서
집 마당에 쏟아놓으면, 난 부산의 집에 가져간다며 조그맣고 이쁘고 빨갛게 잘 익은
토마토만 선별해서 자루에 담으며 놀음.
그렇게 담아서 방에 가져다 한쪽켠에 자루를 놓아두면,
큰어머니는 '토마토를 이렇게 담아놓으면 먹지도 못하고 다 상한다'...라며,
내가 안보는 사이 다시 마당에 다 부어버림.
* 어느 하루는 큰어머니와 무슨 일로 싸운 후,
부산 집에 돌아간다며 토마토 자루를 끌고 구포다리 앞까지 걸어오니
큰어머니가 쫒아와서 다시 끌려감. ㅎㅎㅎ...
* 아버지와 어머니가 큰아버지댁에 나를 데리러 오곤 했는데,
그 기간이 일주일 정도인지 보름인지, 아니면 한달인지 기억이 나지 않음.
* 둑길에서 놀고있을 때 어머니가 둑길로 저만치 달려오면
뛰어가서 안기며 반가워서 울고 그랬던 기억이 있음.
(큰어머니와 다툼이 잦았던지라, 어머니를 보니 그간의 서러움으로 울었는지도 알 수는 없음. ^^...)
* 김해가 부모님 두 분 모두의 고향인 까닭에 큰아버지 집 주변으로 외할머니댁과 큰이모댁도 있었음.
오늘은 이 집에 놀러갔다가 내일은 저 집에 놀러갔다가 그랬던 것 같음.
* 큰 이모댁에 가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어이~ 부산촌놈!... 뭐하러 왔어?... 느그 집에 가!'...라며 놀려대고 했음.
* 큰아버지댁인지 큰 이모댁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5~6세때로 기억하는데 그 동네 내 또래 가시내와 메뚜기를 잡으러
벼가 키만큼 자란 논둑길을 따라 한참을 멀리 걸어갔다가 돌아오곤 했었는데...
어릴 적 기억인데도 그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이 아직도 어렴풋이 느껴짐.
처음 이성에 끌려 느껴본 감정은 지금은 아련함이지만, 그 때 당시엔 어떤 '싱숭생숭함'이랄까?...
* 큰 어머니는 큰아버지 사망후 전 재산을 다 가지고 재가하였으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애를 낳았다고 함.
(큰 어머니는 고향이 김해 사람은 아니고 경남인지 경북인지 생각이 안남)
* 이런 소싯적 기억때문에 내가 큰아버지 제사를 지금도 지내고 있음.
뭐, 반드시 소싯적 기억이 없다 할지라도,
아버지가 살아생전 모시던 제사를 독자인 내가 계속 안모시면 어쩔거임?...
비록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
내가 얼굴도 못본 조부모 제사와 큰아버지 제사는 지내지 말라고 나에게 얘기했지만,
당신 자식의 번거로움을 덜어주려 그렇게 당부한 것임을 모르지 않는 바,
내 육신이 온전한 날까지는 그들의 제사를 모셔야지.
<총평>
나의 큰아버지!... 불행한 남자였음.
우리 아버지도 그렇긴 하지만.
아버진 부산에서 회사생활하며
돈도 많이 벌어봤고, 놀기도 놀아봤고, 한량짓도 해봤지만,
큰 아버지는 할아버지 유산으로 남은 집과 땅으로 고향에서 농사지으며
오로지 일만 하다 젊은 나이에 일찍 돌아가셨다.
그러니 뭐 놀기를 놀아봤겠나?...
돈을 그만큼 써봤겠나?...
그렇다고 자식낳는 능력이 있어 자식키우는 재미를 누려보기라도 했나?...
낙이라곤 오로지 낙동강 마을근처 지천에서 가끔 낚시해서
민물회를 안주로 술 한잔 하는 즐거움밖에는 더 있었을까 싶다.
(그 결과가 간암이었는지 모르지만... 당시에 김해 사람들은
민물회를 즐겼으므로 인해 간디스토마 등의 감염이 심했던 것으로 안다.
간디스토마가 간암의 직접적 발병원인인지는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열심히 일해서 마누라(큰어머니) 좋은 일만 다 시켰지.
큰어머니는 큰아버지 사망후 모든 재산을 다 가지고 재가했으니...
큰아버지 자신의 복이 그것밖에 안된 것이었다면 어쩔 것이며,
신혼초기 애낳아 기르는 기쁨을 누려보지 못한 대신
30대 후반에 남편 사망후 큰 재산을 획득하여 재가한 큰어머니도
그게 자신의 복이라면 어쩔것인가?...
큰아버지!... 살았을 때 가난한 동생(아버지)이 찾아갈 때면
조카 학비라도 좀 보태주고 하지 그랬어요?...
지금도 내 제삿밥 얻어먹고 있는 양반아!...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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