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공동체나 자신의 역사를 고통스러운 것으로 인식할 것이다. 성공적인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현재의 바람직한 상황에 결코 그냥 도달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공동체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수많은 고통스러운 역사적 기억을 가지고 있다.
우리 사회 역시 예외가 아니다. 어쩌면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니고 있는 사회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가까운 역사적 사건에 관한 한,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기억의 핏빛은 아직도 선연하다. 근대 이후 우리의 역사는 온통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그 고통의 기억을 딛고, 아직은 문제투성이지만, 그러나 희망의 몫이 절망의 몫보다 훨씬 더 큰 미래를 준비해 가고 있다. 21세기에 대한민국은 세계무대 안에서 웅비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현재 맞닥뜨리고 있는 교착 국면을 슬기롭게 돌파할 것이라는 전제조건 하에서만 가능해지는 가정이다. 자칫 이 국면을 잘못 넘기면 우리는 다시 경쟁력없는 국가로 전락할 것이다.
단언하건대, 대한민국의 미래 경쟁력의 원동력은 성공적인 민주화 경험에서 나온다. 돌이켜보면, 이 나라는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망쳐놓으면 민초들이 두들겨맞아가며 맨손으로 끊임없이 일으켜 세워 온 나라이다.
근/현대사만 놓고 보더라도, 3.1 운동에서 시작된 무모할 정도의 저항은 그것이 민초의 의지와 결합되지 않았다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3.1 운동을 초기에 주도한 세력이 지식인 그룹이었다 할지라도, 그 생생한 에너지는 민초들의 결연한 저항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3.1 운동을 주도했던 지식인 그룹이 일제의 회유와 협박 앞에 모두 엎어진 뒤에도 민초들은 3.1운동의 맥을 이어갔다. 대지에서 막바로 영감을 길어낸 이 끈질긴 독립성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면, 자유당 정권 앞에서 일어선 4.19도, 박정희의 잔인한 억압을 18년씩 견디며 기어이 쟁취해낸 민주화의 성과도, 살인마 전두환 앞에 다시 맨몸으로 저항하며 무기가 동원된 극한 상황에서도 완전한 질서를 유지했던 5.18의 빛나는 코뮌도, 넥타이 부대가 열정에 가득찬 음성으로 아스팔트바닥에 나서서 기어이 군부통치를 종식시킨 6.10의 빛나는 경험도 설명할 수 없다.
한국인은 그 영혼 안에 끈질긴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고, 유례없이 잔혹했던 귀족의 억압을 딛고 자신의 존재의미를 확인할 만큼 자신의 생의 위엄에 대한 긍정적 비젼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궁극적 아이콘은 일제협력자이자 민초의 희생을 자신의 것으로 찬탈한 독재자 박정희와 그에게 상징적으로 기식하고 있는 기득권 지식인들이 아니라, 억압과 절망을 딛고 생의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자기 존엄성에 대한 확신을 맨몸으로 증언했던 유관순과, 자신의 몸을 역사 안에서 횃불로 밝힌 전태일들이다. 그들은 진정으로 위대한 혼의 소유자였다. 그들이 우리의 진정한 아이콘이다.
이들의 영혼을 들여다보면, 이 나라가 20세기 초의 잔혹한 제국주의적 수탈을 36년씩 받고도 어떻게 몸을 일으켜 세계 선진국 진입을 꿈꾸는 단계까지 왔는지 이해할 수 있다. 민초의 영혼이 깨어나는 순간, 이 땅은, 외세와 외세에 결탁한 지배계층의 억압에 짓눌려 날개를 펴지 못했던 잠재력을 분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식민지 경험을 가진 나라들 중에서 어째서 한국만이 그 피폐함을 이겨낼 수 있었는지, 그리고 전제군주의 개념이 유난히 강고했던 아시아 여러 나라 중에서 유일하게 성공적인 민주화를 쟁취했는지 확인시켜준다.
나는 한류열풍의 바탕도 우리의 성공적 민주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고급문화가 양식화에 성공했지만, 대중문화 수준에서 설득력있는 형태를 창조해내지 못하는 동안, 우리의 대중문화는 민주화 경험을 통해서 인류의 보편적인 감성을 건드리는 어떤 경로를 파악했다고 본다.
한국의 성공적인 민주화 경험은 대중의 자기 확신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21세기에 한국이 확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일본이 막강한 경제력을 가지고도 과거에 발목이 잡혀 존경받지 못하는 국가로 가라앉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스스로 쟁취한 자유에 대한 자부심으로 앞으로 치고 나가는 문화국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뇌관은 도처에 널려 있다.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세력이 마지막 방해를 하고 있다. 이 국면을 잘 넘겨야 한다. 우리는 지금 대단히 중요한 기로 앞에 서있다.
경향신문 10월 23일자
ⓒ김정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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