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아직도 가야할 길

라즈니쉬 2014. 10. 9. 23:02

 

1부 훈육편 34항 / 2부 사랑편 49항 / 3부 성장과 종교편 5항 / 4부 은총편 41항 / 후기편 5항

이상, 책을 읽고 총 134항에 걸쳐  도움될 만한 문장을 발췌해 놓았다.

 

450여 페이지의 짧지 않은 책!...

미처 읽을 시간이 없는 분들, 심적으로 고통받는 분들,

그리고...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사막을 건너가고 있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언젠가는 이 내용들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이 페이지를 접하는 모두에게 부디 은총이 깃들기를... 

 

 

1부   훈육

 

1. 삶이 힘들다는 것은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말한다.

 

2. 우리가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바로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는 고통을 통해서다.

   - '고통을 느껴야 배운다' - 벤자민 프랭클린 -

   이러한 이유때문에 현명한 사람들은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은 문제를 환영하며

   실제로 문제가 주는 고통을 환영하는 법을 터득하려 한다.

 

3. '신경증(노이로제)이란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회피한 결과다.

 

4. 어린 눈에 비친 부모는 신과 같은 존재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가 하는대로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5. 어떤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이 가치가 있다는 의미이고,

   어떤 것이 가치가 있을 때 우리는 그것에 시간을 투자한다.  

 

6. 사랑이 넘치는 부모는 아이의 욕구를 파악하고 그것을 생각할 시간을 가지면서,

   결정을 내릴 때 괴로워하고 말 그대로 아이와 고통을 함께 한다.

 

7. 부모가 아이에게 바치는 시간의 질과 양이, 아이에게는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8. "나는 소중한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느낌은 정신건강에 필수적이며 자기절제의 초석이다.

   그것은 부모가 주는 사랑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이러한 믿음은 어린 시절에 획득해야만 한다.

   성인이 되어서 그것을 얻기란 참으로 어렵다.

   역으로 어렸을 때 부모의 사랑을 통해 자신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사람은

   어른이 되어 시련을 겪더라도 그러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

 

9.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전 그런 것들을 고치는 능력이 전혀 없어요, 아니 한 번도 고쳐본 적이 없어요"

    내 말에 그 이웃은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쏘아붙였다.  "그건 시간을 들여 해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도를 깨친 사람같은 간결하고도 자연스럽고도 명확한 대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10. 문제란 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부딪쳐서 해결하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있어서 영혼의 성장과 발전에 영원히 장애가 된다.

 

11. 정신과 의사를 찾아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위 신경증(노이로제)이 아니면 성격장애로 고생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모두 책임감에 장애가 있다.

     신경증인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책임을 지려하고 성격장애인 사람들은 응당 져야할 책임조차 피하려 든다.  

     신경증인 사람들은 세상과 갈등이 생기면 곧바로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버린다.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곧바로 세상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12. 신경증인 사람들은 '꼭 해야했는데' '마땅히 하는 게 좋은데' '해서는 안되는데'와 같은 표현들을 즐겨쓴다.

     이것은 그들이 항상 수준 미달이고 늘 엉뚱한 선택을 하는 열등한 존재로 자각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들은 '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었어' '이렇게 해야만 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와 같은 표현을 심하게 사용한다.

     이는 자신은 선택권이 전혀 없는 사람이고 자기 행동은 전적으로 자기 능력 밖에 있는 외부의 힘에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경증인 사람들은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들에 비해 치료가 쉽다.

 

13. 우리중에 얼마간 신경증이나 성격장애 증상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누구든지 성실하게 치료를 받으면 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사는 동안 책임져야할 것과 그럴 필요가 없는 없는 것을 분간하는 것이

     실존의 가장 큰 문제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14. 신경증 환자들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고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든다.

 

15. 성격장애를 가진 부모는 거의 틀림없이 성격장애나 신경증이 있는 아이들을 만든다.

 

16. 우리가 우리 행동에 책임지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 행동의 결과로 따라오는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는 데서 비롯한다. (중략)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피하려고 할 때 우리는 항상 그 책임을 다른 사람이나 조직이나 존재에 떠넘기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운명'이나 '사회', 혹은 정부나 기업이나 보스든, 그것은 우리의 권한을 그 존재에 양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리히 프롬이 나치즈과 독재주의에 대한 연구서의 제목을 아주 적절하게도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책임이 주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이 매일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한다.

 

17. 힐드 브러치 박사는 <심리요법 학습>의 서문에서

     기본적으로 모든 환자들은 '똑같은 문제, 즉 무력감,

     다시 말해 상황을 대처하고 바꿀 수 없다는 두려움과 심적 믿음이라는 똑같은 문제'를 갖고 심리치료사를 찾아온다고 말한다. 

 

    대다수의 환자들이 겪는 이러한 '무력감'의 뿌리에는 자유의 고통에서 부분적으로나 완전히 도피하고 싶은 욕망과

    부분적으로나 완전히 자신의 문제와 삶에 책임지지 못하는 패배감이 깔려있다.

    사실 자신의 권한을 버렸기 때문에 무력감을 느끼는 것이다.

 

    언제가 됐든 치유가 되려면, 그들은 성인의 삶이란 온통 개인적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완전히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자유로워진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들은 영원히 자신을 희생자라고 느낄 것이다.

 

18. 문제를 해결하는 고통을 다루는데 필요한 훈육의 세번째 요소는 진실에 충실하는 것이다.

     (중략) 세상의 현실을 명확하게 바라볼수록 세상에 대처할 준비를 더 잘할 수 있다. (중략)

     현실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삶의 영역을 통과하는데 필요하 지도와 같다.

     지도가 진실하고 정확하면 기본적으로 우리의 현재 위치를 알게될 것이고,

     가고싶은 곳이 정해질 때 그 곳에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알게될 것이다.

     만약 지도가 잘못돼있고 부정확하다면 대개 길을 잃을 것이다. (증략)

     우리는 지도를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지도를 만들어야 하고 그 과정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인식하기 위해서 노력할수록 우리의 지도는 더욱 커지고 정확해진다.

     (중략) 지도를 만드는 데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무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정확한 지도를 위해 계속해서 지도를 고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19. 전이 : 세상을 바라보고 대응하는 일련의 방식들이 어릴 때 형성되는데,

     이것이 어린 시절의 환경에는 아주 적절하지만 어른의 환경에는 부적절하게 옮겨오는 것.

 

20. 진실이나 현실이 고통스러울 때 사람들은 이를 피하게 마련이다.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절제력이 있을 때만이 지도를 수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절제력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진실에 전적으로 충실해야 한다.

     이 말은 진실이 우리의 편안함보다는 이익을 위해 더 중요하고 절대적임을 믿어야 한다는 의미다.

 

21. 현명하게 산다는 것은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22. 우리가 가진 현실에 대한 지도가 정말 유효한지 확인해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지도 제작자들의 비판과 도전을 받을 수 있게 자기 지도를 펼쳐보이는 것이다.

 

23. 심리치료를 시작하는 것보다 더 비본능적인 행위는 없고 그래서 이보다 더 인간적인 행동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타인의 가장 날카로운 도전을 받기위해 일부러 마음을 개방하고 정밀한 조사와 판단을 받기위해

     타인에게 돈까지 지불하기 때문이다. 

     (중략) 심리치료를 시작하는 것은 가장 용감한 행동이다. 사람들이 심리 치료를 받지않는 가장 큰 이유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용기가 없어서다.

 

24. 심리 치료에서 가장 가치있는 일이란 '50분' 동안에 어떻게 해서든지 좀 더 환자의 일상과 접촉하는 것이다.

     (중략) 정신과 의사나 심리 치료사에게 오는 모든 환자중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도전이나 훈육을 바라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 밖의 사람들은 대개 단순히 '위안'을 찾는다. 도움받는 것과 동시에 도전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

     많은 사람들이 도망가거나 도망가고 싶어한다.  

 

25. 개인이든 단체든 도전에 열린 태도를 취하려면 현실에 대한 지도를 '정말로' 공개해서 공개심사를 받을 필요가 있다.

     기자회견 이상의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에 헌신하는 생활의 세번째 의미는 정직한 생활이다.

     다시 말해서 진실과 현실을 우리가 아는 그대로, 가능한 한 정확하게 대화에 반영하고 있는지(내용뿐만 아니라 말하는 방식도)를

     끊임없이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정직은 고통없이 오지 않는다.

 

26. 심리 치료사들은 치료 초기에는 환자에 대한 자기 생각과 의견, 통찰 등을 말하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환자는 아직 치료사의 생각과 의견과 통찰을 받아들이거나 대처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27. 균형잡기란 우리에게 융통성을 주는 훈육이다. (중략)

     커브길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대신 그 황홀한 속력을 포기하는 고통을 겪을 마음이 내게는 없었다.

    (그래서 나동그라지고 상처를 입고 자전거는 망가졌으며)

     그 때 나는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고통보다 균형을 잃는 것이 궁극적으로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배웠다.

     어쨌든 이것은 일생동안 계속 배워야 했던 삶의 교훈이 되었다.

     누구든지 삶의 여러가지 구부러진 길과 모퉁이와 타협할 때는 계속해서 자신의 일부를 포기해야만 한다.

 

28. 집중적인 심리 치료기간은 집중적으로 성장하는 기간이다.

     그 기간동안 환자가 경험하는 변화는 다른 사람들이 평생 동안 경험하는 것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급속한 성장을 위해서는 이에 맞먹을 정도로 '옛 자아'를 포기해야 한다.

     이는 성공적인 심리 치료를 위해 불가피한 요소다.  

 

    사실 포기하는 과정은 대개 환자가 심리치료사와 약속을 처음 잡기 이전부터 시작된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경우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겠다고 결정하는 그 행동 자체가

   '나는 문제가 없어'라고 하는 자아상을 포기하는 것이다.

 

29. 정신적으로 건강한 인간은 당연히 성장해야 하고,

     정신적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옛 자아를 포기하거나 상실하는 것이 필수 과정이므로  

     우울증은 정상적이고 근본적으로 건강한 현상이다.

    

     그런데 표기 과정에 무언가가 간섭할 때면 비정상적이 되거나 건강을 해치게 되고,

     그 결과 우울증은 길어지고 포기가 완수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주요 이유가 바로 우울증이다.

 

30.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인간 존재는 가장 황홀하고, 영구적이고, 확고하며 무한한 인생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삶에 모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죽음이다. 이러한 '비밀'이 종교의 핵심 지혜다.

 

31. 신학자 샘 킨 저 '춤추는 신'에서...

 

     성숙한 깨달음이란 개인적 경험의 잔재인 선입견과 편견을 이해하고 보완할 때만 가능해진다.

     보이는 것을 인식하는데는 두 가지 행위 모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즉 익숙한 것을 억제하고 낮선 것을 환영하는 것이다.

     이상한 사물이나 사람 또는 사건을 접할 때마다 나는 현재 욕구와 과거 경험 또는 미래에 대한 기대를 기초로

     내가 무엇을 볼 것인지를 결정하곤 한다.

     어느 자료든지 그것의 고유한 성격을 이해하고 인정하고자 한다면 나의 선입견과 왜곡된 감정의 특징들을

     제대로 파악하여 괄호로 묶어놓고 내 인식세계에 새롭고 신기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야 한다. (중략)

     즉 사물이나 사람이나 사건의 고유한 성격이 내 안에 뿌리박게 하기 위해서는 <자아의 탈중심화>를 겪어야만 한다.

 

32. 한사람을 판단하는 위대성의 척도는 고통을 감수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그러므로 고통을 피하고 괴로움에서 도망치는 것이 당신의 목적이라면,

     나는 당신에게 높은 수준의 의식이나 영적 성장을 촉구하지 않을 것이다.

     첫째, 고통없이는 이와 같은 것을 달성할 수 없고

     둘째, 이와 같은 것을 달성한다 하더라도 당신은 지금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봉사하도록 요청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그것이 최소한 당신에게 큰 짐이 될 수 있다.

 

33. 균형잡기라는 훈육과 그 근본이 되는 포기에 관해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포기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먼저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진 것이 없이는 아무 것도 포기할 수 없다.

     이긴 적도 없으면서 이기기를 포기하면 처음 시작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셈인데, 그것이 바로 실패자인 것이다.

     정체성을 포기하기 전에, 자신을 위해 먼저 그것을 만들어놓아야 한다.

     자아를 잃기 전에 당신의 자아를 발달시켜 놓아야 한다.   

     (중략) 많은 사람들은 발전의 이상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의지력은 결핍돼 있다.

 

34. 훈육이란 문제 해결의 고통을 피하는 대신, 문제 해결의 고통을 건설적으로 취급하는 기술 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생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

   

    지금까지 네 가지 기본적인 기술의 특징을 자세히 설명했다.

    즉, 즐거운 일을 미루는 것, 책임을 지는 것, 진리와 현실에 헌신하는 것, 그리고 균형을 잡는 것이다.

    훈육을 이런 기술들의 '체계'라고 하는 이유는 이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행동으로 둘, 셋 또는 전부를 동시에 사용할 수도 있고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상태로 이용될 수 있다.

    이 기술들을 사용할 힘과 에너지와 의지는 사랑이 제공한다.    

 

 

2부   사랑

 

1. 나는 사랑을,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영적 성장을 도울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라고 정의한다.

 

   첫째 - 목적론적인 정의.

            사랑의 행위가 지향하려고 하는 목표나 목적의 관점에서의 정의라 하겠는데, 이 경우 그 목표란 영적 성장이다.

 

   둘째 - 신기한 순환적 과정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는 과정이란 진화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자기 한계를 성공적으로 확대시켜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이전보다 더 큰 존재로 성장할 것이다.

            따라서 사랑의 행위가 타인의 성장을 목적으로 할 때도 역시 그 또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는 진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 남을 위한 사랑과 더불어 자신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고 있다.

            사랑이란 자신의 발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발전에도 똑같이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남을 사랑할 수도 없다. 

            이는 자기 훈육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사람이 자녀에게 자기 훈육이라는 것을 가르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타인의 정신적 발전을 위해 자신의 정신적 발전을 포기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신의 힘을 키우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힘의 원천이 되어줄 수 없다.

 

   넷째 - 자기 자신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사랑은 노력없이는 안된다. 다시 말해서 사랑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끝으로 - 나는 '의지'라는 단어로 욕망과 행동을 구분해보고자 한다. 

               욕망이 반드시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지는 행동을 유발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욕망이다.

               이 둘의 차이는 '오늘 밤 수영하러 가고싶다'라는 말과 '오늘 밤 수영하러 간다'는 말의 차이와 같다.

               우리 문화권 안에서는 누구나 다 얼마간은 사랑받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실제 많은 이들은 사랑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랑하려는 욕구 자체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사랑은 행위로 표현될 때 사랑이다. 사랑은 의지의 행동이며, 다시 말해서 의도와 행동이 결합된 결과다.  

 

2. 사랑에 대한 모든 오해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며 또는 적어도 사랑의 표시중 하나라는 신념이다. 

   

   두가지 문제,

   첫째,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특별히 성과 관련된 욕망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아무리 깊이 사랑할지라도 아이들과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다.

           동성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 동성애적인 성향이 없는 한 - 아주 좋아할지라도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오직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성적으로 자극되었을 때에만 사랑에 빠진다.

 

   둘째,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예외없이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누구와 사랑을 하건 관계가 오래 지속되면 어느 순간 사랑의 감정에서 깨어난다.

           이 말은 사랑에 빠졌던 대상을 반드시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사랑에 빠지는 경험의 특징인 황홀한 사랑의 느낌은 항상 지나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3. 사랑에 빠지는 현상의 본질은

   자아 경계의일부를 과감하게 무너뜨리고 자신의 자아와 다른 사람의 자아가 하나가 되는 일체감을 느끼게끔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로부터 갑작스럽게 빠져나오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폭발적으로 쏟아붓고,

   이러한 자아 경계의 붕괴에 따른 고독감의 중단은 우리 대부분이 무아지경으로 경험하는 것들이다. 

   나와 그 사람은 하나가 된다! 고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4. 어떤 경우에(모든 경우는 아니다) 사랑에 빠지는 행동은 일종의 퇴행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경험은 아기였을 때 어머니와 하나가 되었던 기억과 같다.    

   이런 일체감과 더불어 어렸을 때 성장하면서 포기해야만 했던 전지전능함을 다시 경험하게 된다. 

   모든 일들이 가능해 보인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된다면 모든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고 느낀다. 

   우리는 사랑의 힘이 반대세력을 굴복시키고 어둠 저 편으로 사라져버리게 만들 것이라고 믿는다.

   장래는 온통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의 이러한 비현실적인 느낌은, 

   두살 난 아이가 자기를 집안에서나 세상에서 무한한 권력을 가진 왕으로 착각하는

   비현실적인 느낌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두 살짜리 아이가 전지전능에 대한 환상을 깨나가듯이,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일체감에 대한 환상도 깨 나간다. (중략)

   다시금 그들은 서로 떨어진 별개의 두 개체가 된다.

   이 정도가 되면 그들은 서로 헤어지거나 참사랑을 시작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내가 사용하는 '참'이라는 말은, 

   사랑에 빠질 때 사랑한다고 인식하는 것은 허위라는 것과 우리가 느끼는 주관적인 사랑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5. 참사랑은 때로 사랑한다는 느낌이 없는 관계에서 생기기도 하고,

   사랑한다는 느낌이 없는데도 사랑을 갖고 행동할 때 일어나기도 한다. 

   처음에 언급한 사랑의 정의를 생각할 때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참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다음의 몇가지 이유를 들어 얘기할 수 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의지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의식적인 선택이 아니다. (중략)

   사랑에 빠지는 감정 자체를 피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감정에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개인의 한계나 경계를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자아 경계의 붕괴다. 

   개인의 한계를 확장시키는 데는 반드시 노력이 뒤따라야 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일에는 노력이 필요없다.

   게으르고 훈육안된 개인도 활기차고 헌신적인 사람만큼 사랑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일단 사랑에 빠지는 소중한 순간이 지나고 자아 경계가 제자리로 돌아오면 사람들은 환상에서 깨어날 것이다. 

 

6. 사랑에 빠지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자아 경계의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붕괴 이외에 또 어떤 면이 있을까?

   잘은 모르겠으나 사랑에 빠지는 현상의 성적 특성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그것은 짝을 구하고자 하는 유전적으로 결정된 성적 본능의 발로가 생각한다.  

  

   다시 말해, 사랑에 빠진 행위의 특징인 일시적인 자아 경계의 붕괴는

   내부의 성적 충동과 외부의 성적 자극의 결합에 대한 인간의 전형적인 반응이다. 

   그런데 이런 반응은 종족 보존을 위해 성적 결합의 가능성을 더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 

 

   또는 다소 우스꽝스럽게 말해 사랑에 빠지는 것은, 

   가만히 두었더라면 분별력을 갖추었을 우리의 정신을

   유전인자가 속여 결국은 결혼이라는 덫에 걸리거나 빠트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7. 사랑에 빠져 성행위를 할 때 수반되는 일시적인 자아경계의 붕괴는,

   참사랑을 시작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헌신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일생동안 사랑한 후에야 맛볼 수 있는 보다 지속적이고 신비한 황홀감을(장려하는 차원에서)

   미리 조금 맛보게 한다. 

   그러므로 사랑에 빠지는 것은 참사랑을 향한 동기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랑에 빠지는 것 자체는 사랑은 아니지만 그것은 크고 신비로운 사랑이라는 세계의 일부다.  

 

8. 사랑에 관한 흔한 오해중 두번째는 의존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중략) "당신이 말하는 것은 기생이지 사랑이 아니에요.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면 당신은그에게 기생충과 다름없습니다.

   당신의 관계에는 선택도 자유도 없습니다. 그것은 사랑이기보다는 오히려 필요의 문제입니다. 

   사랑이란 선택의 자유로운 실천입니다.

   서로가 없어도 잘살 수 있지만 함께 살기로 선택할 때만이 서로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9. 수동성 의존적 성격 장애

    수동적으로 의존하는 사람은 언제나 사랑받는 데 급급한 나머지 다른 사람을 먼저 사랑할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다.

 

    애들을 데리고 떠난 여자/ 가족없이 못살겠다는 남자/ '이제 모든 것이 괜찮습니다' / '가족과 다시 합쳤습니까?' 

    아뇨, 어젯밤 술집에서 여자를 만났어요' /   

   

   이러한 갑작스러운 변화는 바로 수동적 의존성을 지닌 사람들의 특징이다.

   의지할 사람이 있기만 하면 누가 됐든지 상관없어 보인다.

   정체성을 줄 사람만 있으면 그들의 정체성이 무엇이든지 간에 상관없는 것이다.

 

10. '건전한 결혼은 오직 강하고 독립적인 두 사람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수동적인 의존은 사랑의 결핍에서 시작된다.

     수동적 의존성이 있는 사람들이 겪는 내적 공허감은

     유년기에 필요로 했던 부모의 애정 및 관심과 충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결과다. 

 

11. 수동적인 의존성이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을 때 나타나는 가장 흔한 장애물이 

     약물과 술에 대한 의존성이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중독성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 중독돼 사람을 빨아먹고, 그럴 사람이 없을 때는 사람대신 술을 탐닉하거나 마약같은 약물에 중독된다.

 

    요컨대 의존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상대방에게 치열하게 애착하도록 만드는 힘이다. 

    그래서 사랑이라고 착각할 수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과는 정반대다. 

    처음 그것은 부모의 사랑이 결핍된 데서 시작해서 영원히 사랑에 실패하게 만든다. 

 

12. 사랑의 유일한 참된 목적은 영적 성장이나 인간의 발전인 것이다. 

     취미는 자기를 풍요롭게 하는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할 때 - 영적 성장을 목적으로 자신을 길러나갈 때 -  우리는 자신에게 

     영적인 것이 아닌 것도 모두 제공해야 한다. 

     영혼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육체 역시 영양 섭취를 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먹을 것과 살 곳이 필요하다. 

     아무 영적 발전에 헌신적일지라도 휴식과 운동과 기분 전환은 반드시 필요하다. 

     성자들도 역시 잠을 자야하고 선지자들조차 놀아야 한다. 

     그러므로 취미란 자신을 사랑하는 수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취미가 목적 그 자체가 될 때에는 자기 발전의 수단을 대신하게 된다. 

 

13. 좀 더 엄밀하게 정의를 내리면, 우리는 인간만을 사랑할 수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물과 비교해서 생각할 때 실질적인 성숙이 가능한 존재는 인간뿐이기 때문이다. 

 

14. 갓난 아기와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것이나 의존적이고 복종적인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 모두가

     본능적인 행동 패턴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중략) 그리고 이것은 '사랑에 빠진다'는 본능적 행동과 비슷하다. 

     이것은 절대로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별다른 노력이 필요없고, 전적으로 의지나 선택에 따른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종족의 생존을 독려하지만 종족의 발전이나 영적 성장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그 안에서 사람들을 향해 손을 뻗고 참사랑이 싹틀 수 있는 인간관계를 솔선해서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사랑과 흡사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이 있어야 건강하고 창조적인 결혼으로 발전하든지,

     건강하게 영적으로 성장하는 아이로 기르거나 인류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다. 

 

15. 요컨대 양육이란 단순히 먹여주는 것 이상이라야 한다. 

     영적인 성장을 북돋워주기란 어떠한 본능적 행동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과정이다. 

     앞서 말한 어머니가 아들을 학교에 보낼 때 버스를 못타게 하는 것은 좋은 사례다.

     직접 운전해서 아이를 데려가고 데려옴으로써 아이를 열심히 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아들에게 필요한 양육방식이 아니며 분명 영적 성장을 촉진하기 보다는 퇴보시키는 방식이다. 

 

16. 사랑은 단순히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분별있게' 주고, 마찬가지로 분별있게 주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분별있게 칭찬하고, 분별있게 비판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과 더불어 분별있게 논쟁하고, 싸우고, 맞서고, 몰아대고, 밀고 당기는 것이다. 

     그것은 리더십이다.

     분별있다는 것은 판단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며, 판단은 본능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심사숙고해야 하며 때로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필요로 한다.

 

17. 분별없이 주기만 하는 파괴적인 양육의 이면에는 많은 동기가 숨어있다.

     

     알코올 의존증 환자였으며 가족에게 무관심했던 남자 /

     그런 남자를 아버지로 두었던 목사 /

     부인은 만성우울증, 두 아들은 정신과 치료 / 

     아들과 부인에게 모든 시간을 바쳐 헌신함.

 

     아버지처럼 무심하고 무관심하게 살지 않고 인정많고 가족을 염려하는 사람이 되기로 맹세했던 기억.

     목회직을 포함한 많은 행동들이 사랑많고 인정많은 사람으로서의 이미지를 유지하는데 바쳐짐. 

     그가 잘 이해하지 못햇던 것은, 그가 가족을 얼마나 어린 아기처럼 대했는가 하는 것. 

 

    그가 분명히 알아야 했던 것은,

    사랑한다는 것은 그저 행동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완전히 바쳐야 하는 복합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즉, 머리와 마음이 같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가능한 한 아버지와는 달라야 된다는 강박 관념때문에

    그는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융통성있는 대응체계를 발달시킬 수가 없었다.

 

    적절한 때에 주지않는 것이 적절치 않은 때에 주는 것보다 더 인정을 베푸는 것이라는 점을 배워야 했다.

    또한 스스로 돌볼 능력이 있는 사람을 돌보기보다는 독립심을 길러주는 것이 오히려 사랑이라는 사실도 배워야 했다. 

    또한 자신의 욕구와 화나는 이유 그리고 분노와 기대치를 표현하는 것은

    자기 희생과 마찬가지로 가족의 정신건강에 꼭 필요하며, 감싸주고 자기감정을 숨기는 것만큼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사랑에는 포함된다는 것도 배워야 했다. 

 

18. 보통 사람들은 마조히즘과 사디즘을 순전히 성적 행동과만 연관시켜서,

     신체적 고통을 받거나 가하는데서 오는 성적 쾌락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순전히 성적인 사도-마조히즘은 정신 질환으로서는 비교적 드물다.    

     오히려 그보다 더욱 빈번하고 결과적으로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 사회적인 사도-마조히즘 현상이다. 

     이 경우에 사람들은 성적 관계가 아니라 인간관계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거나 스스로 고통을 받고자 한다. 

 

19. 사랑은 자신의 변화를 의미하지만, 이것은 자기 희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확대인 셈이다.

     순수한 사랑은 자기를 채워나가는 활동이다. (중략)

     진정한 사랑의 경우, 그 목적은 항상 영적 성장이고, 사랑이 아닌 경우에는 그 목적이 항상 다른 것에 있다.

 

20. 사랑이 느낌이라고 믿는 오류는 애착과 사랑을 혼동하기 때문에 생긴다.

     사랑과 애착이 비슷한 과정을 거쳐 일어나기 때문에 이러한 혼돈이 생기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첫째, 우리는 생명이나 영혼의 유무에 관계없이 어떤 대상에 애착한다. 

     둘째, 다른 인간에게 애착한다는 것이 대상의 영적인 발전을 위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셋째, 애착의 강도는 지혜나 헌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넷째, 애착은 떠다니는것, 순간적인 것일지 모른다. (중략) 어떤 것에 대한 애착이 실현되면 바로 그에 대한 탈애착이 일어난다. 

 

     반면에 진정한 사랑은 책임있고 지혜로운 행동을 내포한다.

 

21. 건설적인 결혼은 건설적인 치료처럼 부부간에 자기 느낌을 규칙적으로, 즉 일정하고 변함없이,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관계에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부부는 조만간 그 사랑에서 빠져나온다. 

     짝을 찾으려는 인간적 본능이 사라지는 그 순간에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 

     항상 옆에 있어야만 한다는 느낌에서 벗어나 얼마동안 서로 떨어져 있고 싶을 때가 있다.

     바로 이 때 서로의 사랑은 시험대에 오르며 그들의 사랑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알게 된다.

 

22. 나는 사랑을 정의하기를, 

     자신이나 타인의 영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키려는 '의지'라고 했다.

     진정한 사랑은 감정보다는 의지에서 나온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려는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사랑의 느낌이 없어도 사랑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다. 

     사랑의 느낌이 있으면 더욱 좋다. 그러나 느낌이 없을 때도 사랑하려는 의지와 헌신은 여전히 존재할 수 있으며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느낌으로 행동하는 것을 억제할 능력이 있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23. 사랑과 사랑의 느낌을 혼동하는 보통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자기기만을 하게 된다. 

     알코올 의존증 환자인 남자가 부인과 아이들을 돌봐야 할 절실한 순간에 술집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바텐더에게 

     '나는 정말 가족을 사랑한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를 보자. (중략)

     이렇듯 확실히 참사랑과 사랑의 느낌을 혼동하는 성향에는 스스로 위안하려는 성질이 내포되어 있다. 

     느낌안에서 사랑의 증거를 찾는 것은 쉽고 즐겁다.  

     그러나 진실한 사랑은 대체로 경험적인 사랑의 느낌이나 애착을 초월하므로,

     '사랑이란 행위로 표현될 때 사랑이다'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다.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은 선과 악처럼 객관적인 것이지 순전히 주관적인 현상이 아니다.

 

24. 자신의 확장이나 게으름의 타성과 싸우면서 움직여 나가는 것을 우리는 노력이라고 한다.

     두려움에 맞서 나아가는 것을 용기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사랑은 일종의 노력이나 용기다.

     특히 사랑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영적 성장을 위해 시도하는 노력과 용기다.

 

     우리는 영적 성장을 지향하는 이외에 다른 목적에도 용기와 노력을 쏟아부을 수 있다.

     그러므로 노력과 용기가 필요한 모든 일이 반드시 사랑은 아니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 자신의 확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언제나 노력이 아니면 용기이기도 하다. 

     어떤 행동을 하면서 노력이나 용기가 가미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의 행동이 아니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25. 관심을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평범하고 중요한 방법은 말을 들어주는 것이다. 

     막대한 시간을 듣는 데에 보내면서도 사람들 대부분은 그 시간을 낭비한다.  

     왜냐하면 대체로 잘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진심으로 듣는 것은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므로, 결혼 생활에서만큼 이것이 적합한 데는 없다.

    

     훌륭한 정신과 의사에게 가장 필수적인 것은 진심으로 듣는 능력이다.

 

26. 사랑은 노력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음의 본질은 게으름이다.

     게으름이란 주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은 지금까지 다루어온 훈육과 사랑이라는 주제에 내재된 숨겨진 주제라고 할 수 있다.

 

27. 용기란 두려움의 부재가 아니다.

     용기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것,

     즉 두려움에 저항하고 싶은 마음과 싸워 미지의 미래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어떤 단계의 영적 성장이든 사랑이든 항상 용기가 필요하며 모험이 따른다.

 

28. 우리는 지금까지 단순히 애착은 사랑이 아니며, 사랑은 애착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애착이 필요하다.

     우리는 무엇인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만을 사랑한다.

     그러나 애착에는 항상 잃거나 거부당할 위험도 있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식물이건 어떤 것이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보라. 그들은 언젠가는 죽는다.

     누구든지 믿어보라. 상처입을지 모른다 해도.

     누구에게든 의존해보라. 상대가 실망시킬지 모른다 해도.

     애착의 댓가는 고통이다. 고통을 감내하려고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많은 것들이 부족한 채로 살아야만 할 것이다.

 

29. 어떤 차원으로든 앞으로 나아가거나 성장하면 기쁨과 함께 고통이라는 댓가를 치를 것이다.

     우리는 삶을 충만하게 살든지 아니면 완전히 포기하든지 둘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인생의 본질은 변화, 즉 성장과 쇠퇴의 모음이다.

     삶과 성장을 선택하라. 그것은 죽음의 가능성을 함께 선택한 것이다.

 

30. 정당한 고통을 피하려는 시도는 모든 심리적 질환의 원인이 된다.

 

31. 책임감의 문제는 대부분의 정신적 장애가 지닌 주요한 문제다.

     그리고 심리 치료 과정에서도 아주 결정적인 사안이다.

     성격장애를 겪는 사람은 책임감이 약하며, 장애가 심해질수록 책임지는 능력을 전적으로 상실한다. 

     책임감에 얽메인다는 사실이 두려워서라기보다 도대체 책임감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그렇다. (중략)

 

     그 반대로 신경증 환자는 일반적으로 책임감의 본질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공포때문에 때로 마비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통 어렸을 때의 경험은,

     부모가 충분한 책임을 다해주었으므로 그에 대한 보답으로 부모에게 책임을 다하도록 길러졌다.

     그러나 그 후에 죽음이나 이별 또는 장기간의 결별때문에 부모의 사랑이 멈추면,

     아이가 보답받지 못하는 책임감은 참을 수 없이 괴로운 경험이 되어버린다.

 

32. 한사람의 영적 성장이라는 여로에는 많은 기점들이 있다. 

     혼자든 그를 도와주는 치료사와 함께든간에,

     자기의 새로운 세계관에 따라 새롭고 익숙지 않은 행동을 취해야만 그 기점을 통과할 수 있다. (중략)

 

     혼자 모험해야 하므로 어떻게 보면 전쟁에 나가는 군인보다도 더 겁나는 상황일 수 있다.

     군인은 앞뒤로 총이 겨누고 있어 도망칠 수 없지만, 성장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언제라도

     좀 더 제한적이던 과거의, 익숙하고 편한 습관으로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33. 사랑에 있어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모험은,

     겸손한 자세로 파워를 발휘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가장 흔한 예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고하는 행동이다. 

 

34.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게 쉽게 비판하거나 충고하지 않는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때로 그런 행위가 오만하게 보인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적어도 현재 거론되는 문제에 관한 한,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더 우위를 차지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개성과 자아의 독립성을 존중해준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의 개성과 나와 다름을 존중하기 때문에 실제로

     "내가 옳고, 너는 잘못됐다. 너한테 무엇이 좋은지 내가 너보다 더 잘 안다"라고 생각하기를 거부한다. 

 

 35. 사랑하는 사람은 자주 딜레마에 빠진다.

     사랑하는 상대의 삶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존중하는 것과

     상대를 잘 끌어줄 필요가 있어 보일 때, 사랑이 넘치는 리더십을 발휘할 책임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고통스러운 자기 성찰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

     즉,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지혜'가 정말 가치있는 것인지,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당위성 뒤에 숨겨진 동기가 어떤 것인지 엄중하게 점검해야 한다.

     "내가 정말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건가, 아니면 애매한 짐작만으로 이러는 걸까?

     정말 그를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선택한 길이 현명한 것인데도 그렇지않다고 보는 생각은 나만의 편협한 관점이 아닐까?

     내 사랑이 새로운 방향으로 가도록 하는 게 나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닐까? 등등.

     이러한 것은 모두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계속 자문해야 할 질문이다.

 

36. 다른 인간에게 충고하거나 비판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본능적, 즉흥적으로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면서 비판하는 경우와, (오만한 방법)

     양심적으로 자신을 의심하고 돌아보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옳다는 믿음 아래 비판하는 경우다. (겸손한 방법)

 

37.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면 참을성 있고 사려깊게 그러나 활발하게 이따금씩 아이들에게 따지고 비판해야 한다.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부모도 아이들로 하여금 부모에게 따지고 비판할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한다.

     사랑하는 부부 사이에도 결혼관계가 상대의 영적 성장을 촉진시키도록 하려면 서로에게 지속적으로 따져야 한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최고의 비판자가 되지 않으면 어떤 결혼도 참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없다.

 

38. 말을 잘 알아듣게 하고 싶으면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고

     듣는 사람이 실행 가능한 범위에서 말해야 한다. (중략)

     오로지 겸손한 사랑을 통해 인간은 감히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39. 감정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되겠지만 한편 자기훈육이 감정을 짓눌러 완전히 제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또한 아니다. 

     나는 자주 환자들에게 감정은 그들(환자)의 노예이며, 자기 훈육의 기술은 노예를 소유하는 기술과 같다고 말한다. 

 

40. 진정한 사랑은 자아의 확장을 포함하기 때문에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요구된다. (중략)

     더 많이 사랑할수록 더 오래 사랑할수록 나는 커진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다시 채우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영적 성장을 도우면 도울수록 나 자신의 영적 성장도 더욱 더 촉진된다.

 

41. 진정한 결혼은 공동 협조 체제로서 상호간의 협조와 배려,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영적 성장의 정상을 향한 여정에 들어선 서로에게 힘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 

     남성과 여성 둘 다 가정을 돌봐야 하고 둘 다 각자의 생에 도전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42.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의 영적 성장이며, 정상에 오르는 이 고독한 여행은 혼자서 할 수밖에 없다.

     (중략) 현악기의 줄들이 같은 음악을 울릴지라도 서로 떨어져 홀로 있듯이...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중에서...)

 

43. 사랑은 정신치료다. (중략)

     나는 정신과 의사의 일이 환자의 영적 성장을 돕는 것과 관련있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고,

     단언컨대 나 자신의 영적 성장도 포함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중략)

 

     심리치료를 효과적이고 성공적으로 만드는 본질적인 요소를 알았다.

     그것은 '무조건 긍정적인 말을 해주는 것'도, 마법의 말과 기술과 태도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관심과 노력이다.

     치료사가 환자의 성장을 돕기 위해 자신을 확장하고자 하는 마음,

     즉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진심으로 사무적이 아닌 개인적 감정 차원에서 관계를 형성하고,

     실제로 환자와도 자신과도 싸우고자 하는 마음이다. 

     간단히 말하면 성공적이고 의미있는 심리 치료의 근본 요소는 사랑이다. 

 

44. 환자가 치료사를 향해 갖는 사랑의 느낌을 일반적으로 '전이'라 하고,

     치료사가 환자에게 갖는 사랑의 느낌으은 '역전이'라고 한다. 

     이런 호칭은 이러한 느낌들이 비정상적인 것이며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기 보다는

     문제의 일부가 되므로 피해야 한다고 암시한다. 모두 매우 불합리한 생각이다.

 

     (중략) 사실 전이의 본질은 많은 경우 환자가 치료사와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하는 것을 막는 데 있다. 

     그런데 치료를 위해서는 환자가 성공적인 사랑의 관계를 경험할 수 있도록 전이를 이용하여 작업한다.

     마찬가지로 환자가 심리치료의 훈육을 받기로 결정하고 치료에 협조하며 기꺼이 치료사에게 배울 마음을 갖고,

     이런 관계를 통해 성공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할 때, 치료사가 환자에게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집중적인 심리 치료는 여러가지 면에서 부모 역할을 대신하는 과정이다.

     심리 치료사가 환자에게 갖는 사랑의 느낌은 좋은 부모가 아이에게 갖는 사랑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치료를 성공적으로 이끌려면 환자를 사랑하는 것이 필수다. 

 

45. 대부분 정신적인 병은 성공적인 성숙과 영적 성장을 위해 부모에게서 받았어야 할 사랑의 결핍이나 결함때문에 생긴다. 

     그러므로 심리 치료를 통해 치유되기 위해서는 환자가 받지 못했던 진정한 사랑의 최소한만이라도

     심리 치료사에게 받아야 하는 것이다.     

 

46. 치료사와 환자 사이의 성적 관계는 그들을 자유롭게 풀어놓기 보다는 환자의 미숙한 집착을 더 강화하는 것 같다.

     얼마간의 증거자료와 이론이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관계가 성적으로 발전하지 않았을지라도 치료사가 환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해롭다.

     이미 보았듯이 사랑에 빠지면 자아 경계가 무너지며, 개인 사이에 존재해야 할 정상적인 독립심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47. 심리 치료가 진정한 사랑의 과정이어야만 한다(성공적이려면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개념은

     전통적인 정신의학계에서는 다소 이단으로 취급된다. 

     그렇다면 동전의 이면이라고 할 수 있는 다음의 견해,

     즉 심리 치료가 진정하게 사랑하는 것이라면 사랑은 항상 심리 치료처럼 해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단이다.  

     배우자를 순수하게 사랑하고, 부모, 아이, 친구를 진정 사랑한다면, 또 그들의 영적 성장을 지지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확장시킨다면 우리가 그들에게 심리 치료를 하고 있다는 말인가?...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중략) 진정으로 사랑하는 관계는 어떤 관계든 서로 심리 치료적이다.

 

48. 모든 인간의 상호 작용은 배우거나 가르치는 (치료를 주거나 받는) 기회이므로

     이를 통해 배우지도 가르치지도 않는다면 좋은 기회를 지나치고 마는 것이다. 

 

49. 사랑의 결핍은 정신 질환의 주요 원인이 된다는 것과

     결과적으로 심리 치료에 있어서 사랑은 기본적인 치료 요소라는 것이 제시되었다.

 

 

3부   성장과 종교

 

 

1. 환자의 세계관은 항상 문제의 근본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치료사는 근본적으로 이를 알아야 하고 치료를 위해선 필수적으로 그들의 세계관부터 교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지도하는 치료사들에게

    "환자의 종교를 찾아내십시오. 혹 종교가 없다고 하더라도 찾아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2.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따라서 믿는 경향이 있으며,

    어린 시절 자아 형성 과정에서 들었던 세계의 본질을 그대로 진리라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가족이라는 사실을 - 심리 치료사를 제외하고는 -  잘 모른다.

   

    성장 발달에 가장 기본이 되는 문화는 가족 문화이고, 부모는 그 '문화의 지도자'인 것이다.

    더욱이 가족 문화의 영향중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가 말해준 신과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부모가 행동으로 보여주는 세계다.  

    즉, 부모가 서로에게 또는 가족에게, 가장 기본적으로는 자신에게 어떻게 행동하는가 하는 것이다.

    즉, 세계의 본질에 대한 배움은 자라면서 가족이라는 작은 우주에서 경험하는 것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부모의 말로 세계관이 결정된다기보다는 오히려 부모의 행동으로 창조해내는 특수 세계가 바로 그것을 결정한다.

 

3. 하느님의 성격에 관한 첫째 견해는 바로 부모의 성격을 투사한 것 또는 부모의 성격을 혼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부모가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람들이면, 사랑하고 용서하는 하느님을 믿게 되기가 쉽다.

    부모가 혹독하게 벌주는 사람드이면, 그와 마찬가지로 괴물같은 하느님을 떠올리며 성장하기 쉽다.

    또한 부모가 잘 돌봐주지 않는다면, 세상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종교관이나 세계관은 대부분 특수한 어린 시절의 경험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이 문제의 핵심을 바로 볼 수 있게 한다.

 

4. 훈육에 관한 1부의 마지막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려면 오래전에 형성된 낡은 자신을 포기하고 낡아빠진 지식을 죽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넓은 시야를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기꺼이 좁은 시야를 죽여야만 한다.

 

5. 종교를 단순하게 생각하는 정신과 의사는 어떤 환자에게는 오히려 해로울 수 있다.

    모든 종교가 선하고 건전하다고 여겨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목욕물과 함께 내버리듯, 모든 종교를 병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도 역시 해롭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환자의 종교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 옳다고 믿으면서도,

    문제가 복잡하다는 핑계 아래 완전한 객관성이라는 장막뒤에 숨어 종교에는 개입하지 않으려는 태도도 환자에겐 해롭다.

 

 

4부   은총

 

1. 심리 치료사들이 꿈의 분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꿈도 있다. 무의식이 보다 분명한 언어로 무엇인가를 제시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성급한 기대이다.

    (그러나 앞의 경우처럼) 성공적으로 꿈의 의미를 분석했을 때, 그 메시지는 늘 우리의 영적 성장을 북돋우려고 고안해낸 것처럼 보인다. 

 

2. 내 경험에 의하면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꿈들은 꿈을 꾼 사람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러한 도움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예컨대 앞으로 닥칠 위험에 대한 경고,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에 대한 해결책,

   스스로 옳다고 믿는 일이 사실은 틀렷음을 알려주는 적절한 표시,

   또는 반대로 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일이 사실은 옳다는 격려,

   자신이 잘 모르는 것에 대한 정보 제공, 방황하고 있을 때의 길잡이,

   허둥대고 있을 때 가야할 길을 가르쳐주는 이정표 등의 형태로 등장한다. 

 

3. 너무나 낮설어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 바로 무의식의 세게이고 그 무의식이 의식세계에 나타나는 방식이다.

   프로이트를 위시한 초기 추종자들이 무의식을 원시적이고 반사회적이며 악마적인 것의 저장소로 취급한 이유도,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특성과 이와 연관된 의식의 저항때문이다. 

 

   무의식이 '나쁜' 것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의식이 그것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사람들은 정신 질환을 무의식에 거주하는, 마음속 깊이 숨어있는 악마로 생각했다.

   이러한 그릇된 관점을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칼 융이다.

   융은 여러 방법으로 이 일을 수행했다. 그리고 이것을 '무의식의 지혜'라는 말로 표현했다.

   내 경험을 보아도 정신 질환은 무의식의 소산이 아니라는 융의 견해는 분명 옳다.

   정신 질환은 오히려 의식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거나 의식과 무의식의 부조화에서 빚어지는 현상이다.

 

4. 예를 들어 억압이라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프로이트는 많은 환자들에게서 그들이 아직 분명히 깨닫지 못하지만

   그들을 병들게 하는 성적 욕구와 적개심이 무의식속에 잠재돼 있음을 발견했다. 

   이러한 욕구와 감정들이 무의식에 있기 때문에, 정신 질환은 무의식 때문이라는 관념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왜 무의식속에 처음 생겨났을까? 이것들은 왜 억압되었을까?

   대답은 의식이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기 때문이다. 

   즉 문제는 인간이 성적 욕구나 적개심 따위를 지녔다는 그것이 아니라,

   의식이 그것을 직면하기를 거부하고 또 그에 따른 고통의 감수를 외면함으로써

   그것들을 저 너머의 어두운 곳으로 밀어넣으려는 바로 그것이다.  

 

5. 지금은 은총의 헤택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 실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서라는 것을 지적하는 선에서 그치자.

   다시 말하면, 우리는 스스로 구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것의 소중함을 모른다는 것이다.

   원하지 않았던 선물이 주어지면 그 가치를 제대로 모르듯이 말이다.

 

   바꿔 말하면 우연한 깨달음이 발휘되는 사건은 모두에게 일어나지만

   우리는 그것이 우연한 깨달음과 관계가 있는 것임을 그냥 지나치기 쉽다.

   그런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6. 신학에는 전통적으로 (이 점에 관한) 두가지 대립된 학설이 있다.

    하나는 유출설로 은총은 인간 외부에 있는 하느님에게서 흘러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재설로 인간 존재 안에 있는 하느님이 은총의 근원이라는 학설이다. 

 

    (중략) 힌두교와 불교 사상가들은 분리된 개체라는 관념을 환상이라고 본다. 

    그들의 용어로는 이를 '마야'라고 부른다.  

          

    * 마야

   

    힌두 철학의 근본개념.

    특히 정통 베단타 경전에 기초한 불이일원론(Advaita) 학파에서 자주 쓰는 개념이다. 마야는 원래 마술의 힘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환상을 믿게 하는 신의 힘 가리킨다. 그후 마야는 현상세계가 진짜라는 우주적인 환상을 생성하는 강력한 힘이 되었다.

    불이일원론 학파에서 마야는 무한한 브라만(최고의 존재)이 유한한 현상세계의 모습을 띠게 하는 우주의 힘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은 경험적 자아로 잘못 알고 있지만 사실은 브라만과 동일한 자아의 참다운 성격에 대한 인간의 무지에 의해

    마야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초래된다.

 

7. 나는 개인을 완전히 다른 개체와 분리된 실체로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의 지적 한계때문에 개체의 개념을 빌려 개인의 경계를 표현하려 한다.

   개인의 경계란 벽처럼 두꺼운 것이 아니라 세포막이나 울타리같이 적당히 개방되어 있어 다른 개체가 침투하여 넘나들 수 있는 것이라고.

   의식이 부분적으로나마 끊임없이 무의식과 상호 침투하듯 우리의 무의식도 우리 바깥에 있는 '정신'에 침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스며드는 그 '정신'은 개체로서의 우리가 아니다.

 

   14세기 노르웨이의 은자 데임 줄리앙은

   은총과 개체 사이의 관계를 '침투 가능한 세포막'이라고 한 20세기의 과학적 표현보다 훨씬 우아한 종교적 용어로 묘사해 놓았다.

 

   "우리 몸을 감싸주는 것은 옷, 살을 감싸는 것은 피부, 뼈를 감싸는 것은 살이며,

   심장을 감싸는 것은 온 몸이듯, 우리의 육신과 영혼은 하느님의 자비에 감싸여 있다. 더구나 훨씬 더 포근하게.

   모든 물질적인 것은 언젠가는 낙아서 사라지지만, 하느님의 자비는 언제나 온전하다."

 

   (중략) 지금까지 이야기한 '기적들'은 인간으로서 성장이 의식적 의지가 아닌 어떤 힘에 의해 도움받는 것임을 보여준다.

 

8. 자연 법칙중에 가장 중요한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는 언제나 보다 정돈된 상태에서 덜 정돈된 상태로, 보다 고도의 분화 상태에서 보다 단순한 분화상태로 흘러간다.

    한마디로 말해 우주는 흘러내려가는 상태이다. (중략)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우주는 수백만년의 세월동안 아래로 흘러내리다 모양도 없고 질서도 없고 미분화된 '물방울'이 되어

   더 이상은 어떤 운동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완전 해체와 미분화의 상태를 '엔트로피'라고 한다.

   엔트로피 상태를 향해 에너지가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엔트로피의 힘'이라고 한다.

   진화의 흐름은 이 엔트로피의 힘과는 정반대다.

   진화 과정은 유기체가 단순한 분자 구조에서 보다 고차원적인 복합 구조, 즉 분화되고 정돈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중략) 나는 진화 과정을 기적이라고 말했다. 점점 조직화되고 분화되는 과정인 이상, 진화는 자연법칙에 역행한다.

   일반적인 사물의 경로대로라면 이 책을 읽고 쓰는 우리는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 진화는 열역학 제2법칙에 있는 소용돌이.)

 

9. 모든 사람은 각기 자기 나름으로 성장하고자 하는욕구를 지닌다.

   그리고 그 욕구를 실현시키려 할 때는 혼자 힘으로 스스로의 저항과 싸워야 한다.

 

10. 개인과 인류 전체의 등을 떠밀어, 무기력이라는 본능적 저항을 이기고 성장하게 하는 이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는 이미 이 힘에 이름을 붙였다. 사랑이라고.

     나는 사랑을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영적 성장을 도울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라고 정의했다.

     우리는 사랑을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성장한다. (중략)

     자아의 확장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사랑은 바로 진화의 행위다.

     그것도 진행중인 진화다. 모든 생명체에 존재하는 진화의 힘은 인간의 사랑이라는 모습으로 인류앞에 자신을 드러낸다.

     인간애 중에서 사랑은 엔트로피의 자연법칙을 무산시키는 기적적인 힘이다.

 

11. 사랑은 어디서 오는 걸까? (중략) 진화라는 전능한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중략)

     사랑은 의식적인 것이지만 은총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밖에 존재하면서 인간의 영적 성장을 돕는 이 강력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12. 사랑하는 능력, 성장하고 진화하려는 열망을 하느님이 어떻든 우리에게 '불어넣어 준' 것이라고 상정한다면,

     곧 이어 우리는 그 목적을 물어야 한다. 왜 하느님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바라는가?

     우리는 무엇을 향해 성장하는 걸까? 진화의 목적, 종착지는 어디일까?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중략) 아무리 조심스럽게 접근하더라도, 사랑을 베푸는 하느님이란 존재를 가정하고 그것을 진지하게 탐구하다 보면

     결국은 한가지 무서운 결론에 이른다.

 

     하느님이 바라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같아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하느님이 곧 진화의 목적이다.

     하느님이 바로 진화시키는 힘의 원천이자 도착지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은 알파며 오메가라고 말하는 의미다. 하느님은 시작이자 끝이다.

 

13. 신에 관한 관념중에는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곳에서 우리를 보살피는 멋진 하느님이 계신다는 오래된 개념이 있다.

     반면 우리에게 분명히 신의 진리, 신의 권능, 신의 지혜, 신의 주체성 등을 획득하라고 요구하는 하느님이라는 개념도 있다.

     인간이 하느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이 믿음은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모든 가능성을 시도할 의무를 지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의무를 바라지 않는다. 그토록 노력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신과 같은 책임을 짊어지고 싶지도 않다. 언제나 모든 것을 생각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인간이 신처럼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버리기만 하면,

     영적 성장을 근심할 필요도, 우리 자신의 의식 수준을 높이려고 애쓸 필요도, 사랑을 실천할 필요도 없다. 

     그냥 되는 대로 주어진 인간으로 지내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하늘에 있고 인간은 땅에 있으며 그 둘은 결코 합치될 수 없다면, 우리는 진화라든가 우주의 질서 유지 등

     모든 책임을 하느님에게 돌리면 된다.

 

     (중략)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때야말로 "자, 일을 끝냈어. 목적을 이룬거야"라고 말하며 쉴 수는 절대로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더욱 지혜롭고 더욱 현명해지도록 끌어올려야 한다.

     이 믿음을 따르면 죽는 순간까지 자기 향상과 영적 성장을 위해 끝없이 노력하기를 게을리 할 수 없다.

     하느님의 책임은 우리의 책임이다. 하느님이 된다는 가능성을 인간이 끔찍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느님이 자신처럼 성장하도록 인간을 적극적으로 양육한다는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게으름에 직면하게 한다.

 

14. 이 책은 영적 성장에 관한 책이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그 반대측면인 영혼의 성숙을 방해하는 것들도 다루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오직 단 하나의 장애물이 있다. 그것은 바로 게으름이다.

     게으름을 극복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장애물은 쉽게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게으름을 극복하지 못하면 다른 어떤 장애물도 뛰어넘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책은 게으름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의 1부 '훈육'에서는 꼭 필요한 고통을 피하려 하거나 쉬운 길을 택하려는 게으름을 살펴보았다.

     2부 '사랑'에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자아의 경계를 확장하려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게으름은 사랑의 반대말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영작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노력이 필요하다.

     이제 게으름으 본성에 관해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살펴보기로 하겠다.

     게으름으 바로 우리 모두의 삶에서 나타나는 엔트로피의 힘이다.  

 

15. 창세기는 하느님이 '저녁 무렵에 에덴동산을 거니는' 습관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대화의 통로가 열려 있었다.

     그렇다면 아담과 이브는 함깨든 따로든, 뱀이 유혹하기 전이거나 후거나, 하느님에게 이렇게 말했어야 하지 않을까?  

 

     "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여기 사는 것이 정말 좋아서 은혜를 배반하고 싶지않은데,

     이 율법만은 정말 이해하기 힙듭니다. 설명해주시면 감사할텐데요." 

   

     물론 그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율법뒤에 숨은 이유를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직접 도전하지도 않고,

     어른답게 대화해 보지도 않고서 그냥 율법을 깨뜨려버렸다.

     그들은 뱀의 말은 경청했지만 행동하기 전에 하느님의 말을 되새겨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유혹당하고 행동에 옮기기까지 그들은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까?

    

     죄의 본질은 바로 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에 있다. 즉, 논쟁의 단계를 생략해 버린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뱀과 하느님 사이에 논쟁을 붙였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아 하느님쪽의 답변을 듣지 못했다.

     뱀과 하느님 사이의 논쟁은 인간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선과 악의 갈등을 상징한다.

     마음속에서 선과 악 사이의 논쟁을 붙여보려고 하지 않는 - 또는 힘을 다하여 싸우지 않는 - 그 태도가 바로 죄를 짓는 원인이다.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며 그 이득을 따질 때, 사람들은 대개 하느님쪽 의견을 따르지 않는다.

     자기 내부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 즉 모든 인간 존재의 마음속에 있는 올바른 지혜를 경청하고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바로 게으름 때문이다. 

 

    (중략) 논쟁을 벌이는 것, 즉 심사숙고한다는 것은 고통과 투쟁의 길로 들어섬을 의미한다.

 

16. 게으름이란 단지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거나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게으름의 주된 형태는 두려움이다.

 

     아담과 이브의 신화를 다시 인용해 설명해보자.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의 율법 뒤에 숨은 이유를 묻지 못한 진정한 까닭은 게으름이 아니라 두려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느님의 분노에 대한 두려움,무서운 하느님과 마주해야 하는 두려움 말이다.

     모든 두려움이 다 게으름은 아니지만 두려움 가운데 상당 부분은 게으름이 원인이다.

     즉,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따른 두려움, 현재의 위치에서 더 나아가면 무언가 잃게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1부 '훈육'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정보를 위협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새로운 정보를 수용한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그들의 지도를 개정하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러한 일을 싫어한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새로운 정보를 수용하기보다는 그것에 대항해 싸우는 경향이 있다.

     이 저항은 두려움 때문에 일어나지만, 그 밑바닥에는 분명 게으름이 숨어있다.

     그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 앞에서의 두려움이다.

 

     2부 '사랑'에서도 나는

     자아를 새로운 영역, 새로운 헌신, 책임감, 새로운 관계, 새로운 차원의 존재등으로 확대하는 모험에 관해 언급했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모험이라 하는 이유는 지금 그대로의 자신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상태의 자신으로 나아갈지도 모를 작업을 수행하는 것은 두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아담과 이브는 하느님에게 솔직하게 물었을 때 일어날지도 모를 일을 두려워했을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쉬운 길로 향했다. 힘들이지 않고도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비겁한 지름길을 택했다.

     그러면서도 잘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하느님께 묻는 것은 많은 일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교훈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17. 환자 중 열에 아홉은 심리 치료를 시작하고서 미처 다 끝내지 못한 채 그만 둔다.

     바로 두려움과 게으름 때문이다. (중략)

 

     가장 두드러진 탈락 현상은 결혼 생활에 문제를 겪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그들은 자신의 결혼이 아주 잘못되었거나 파괴적이어서 정신 건강을 되찾으려면 이혼을 하든지

     아주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결혼 생활을 재정비해야 함을 처음 몇 번의 진료에서 예감한 사람들이다.

     사실 이런 환자들은 진료를 받기 전에 이미 이런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온다.

     처음 몇 번의 진료가 이미 그들이 알고 두려워하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어쨌든 이런 사람들은 혼자 살거나, 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배우자와 오랫동안 노력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거의 이혼이나 다름없는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에 심한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한동안 상담을 받다가 그만둔다. (중략)

     그들은 자신의 고충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각오하기보다는 현재의 고통스러운 현실에 안주하는 쪽을 선호한다.  

 

18. 게으름은 여러가지 핑계로 자신을 합리화한다. 따라서 자아의 더 성숙한 부분도 여전히 너무 나약해서

     게으름을 쉽게 간파하거나 이와 투쟁할 능력이 안된다. (중략)

 

     영적으로 보다 성장한 사람은 자신의 게으름을 잘 아는 사람이다.

     자신이 게으르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덜 게으를 수 있다.

 

19. 우리는 병든 자아와 건강한 자아를 모두 갖고 있다.

     신경증에 걸렸거나 심지어 정신 질환이 있다 하더라도, 겁이 많아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있다 해도,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는 보잘 것 없지만 성장하기를 바라고 변화와 발전을 좋아하고 새롭거나 미지의 것에 마음이 끌리며

     일하기를 좋아하고 영적 진화에 따른 위험을 감행할 준비를 갖춘 영역이 당당히 존재한다.

 

     그런가하면 겉보기엔 건강하고 영적으로 성숙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자신을 고양시키기를 원치 않고,

     낡고 익숙한 것에 집착하며 변화와 수고를 두려워하고, 그 댓가를 생각치 않고 그저 고통없이 안락하기만을 바라며,

     정체되고 퇴보하는인간이 되는 쪽을 택하려는 영역이 반드시 있다.  (중략)

 

     건강한 자아는 우리 속에 숨은 병든 자아에 대해 경계심을 늦춰서는 안된다.

 

20. 앞서 게으름은 바로 원죄며 우리 속에 병든 자아의 형태로 존재하는 악마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중략) 악의 본질에 대한 내 나름의 결론을 간단히 언급하려 한다.

     첫째, 나는 악이 실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중략)

     두번째 결론은, 악이란 게으름의 극한이라는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사랑의 반대말은 게으름이다. 보통의 게으름이란 그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중략)

     단순한 게으름은 사랑이 아닌 것에 불과하지만 악은 사랑을 막는 것이다.

     세번째 결론은, 인간의 진화에 있어 적어도 지금 단계에서는 악의 존재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갖고 있고 엔트로피의 힘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게으름을 이겨낼 수 있으나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이 힘겨울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엔트로피는 거대한 힘인 반면, 가장 극단적인 악의 형태로 그것이 사회적인 힘으로 쓰일 때는 이상하게도 무능해진다.  

 

21. '의식 conscious'이라는 말은 '함께'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접두사 con과 '안다'라는 뜻을 지닌 scire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의식한다는 것은 '함께 안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함께'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무엇을' 함께 안다는 말인가?

 

     나는 마음가운데 의식적인 부분이 놀라운 지식의 저장소라고 말했다.

     우리가 자신을 의식하는 자아로 정의할 때 무의식은 우리보다 많은 것을 안다.

     (중략) 의식하게 된다는 것은 무의식과 함께 아는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지 않을까?

    

     의식이 발달한다는 것은 어떤 것 - 무의식은 이미 알고 있는 것 - 을 알 때 우리의 의식이 저점 더 무의식과 함께 

     알아간다는 것이다. 즉, 의식을 무의식과 일치시키는 과정이다. 이것은 치료사들에게는 낮선 개념이 아니다.

     심리 치료사들은 자신의 직업을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과정 또는 무의식의 영역과 연관시켜 의식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과정으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22. 은총을 발견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장소는 바로 당신의 내부다.

     지금 지닌 것보다 더 큰 지혜를 바란다면 당신의 내부에서 찾아라.

     이 말은곧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지점이 적어도 일부나마 의식과 무의식이 만나는 지점이라는 뜻이다.

     보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의 무의식이 바로 하느님이다.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일부였다. 하느님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무의식이 곧 하느님이라는 개념은)

    우리 안에 내재하는 성령 또는 성신이라는 기독교적 개념과 근본적으로 같은 개념이다.

 

23. <기억, 꿈, 사상> - 칼 구스타프 융 著     

 

     내 견해로는, 삶이란 뿌리에서 영양을 공급받는 식물과도 같다.

     진정한 삶은 뿌리속에 감춰져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땅 위에 나타난 부분은 한여름만을 겨우 지탱한다. 그러고는 시들어 버린다. 스쳐 지나가는 환영처럼.

     인생과 문명의 끊임없는 흥망성쇠를 생각할 때 우리는 절대 허무라는 관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영속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살아남는 그 무엇에 대한 느낌을 나는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우리가 볼 수 있는 ㄱ서은 꽃뿐이고, 꽃은 곧 시든다. 그러나 뿌리는 남아있다.

 

24. (융은) 무의식을 보다 피상적이고 개별적인 '개인 무의식'과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보다 심층적인 '집단 무의식'으로 나누었다.

     내게는 이 집단 무의식이 바로 하느님이다.

     의식은 개인으로서 인간이며, 개인 무의식은 개인 무의식은 개인과 하느님이 만나는 지점이다.

     이 지점에 당도하면 개인 무의식에 어느 정도 소용돌이가 생기고 개인의 의지와 신의 의지 사이에는 당연히 투쟁이 일어난다.

 

25. 앞에서 무의식은 자애로운 사랑의 터전이라고 했다.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그러나 꿈은 사랑의 지혜를 전달하기도 하지만 갈등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꿈은 새로운 활력과 기쁨을 주지만 어수선하고 두려운 악몽으로 괴롭히기도 한다.

     이 어수선함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정신 질환의 원인이 무의식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마치 무의식은 정신 정신 병리의 온상이고, 각종 증후군은 인간을 괴롭히기 위해 지상으로 올라온 악마인 양 생각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미 이야기했듯 내  견해는 정반대다. 

     내 생각으로는 의식이야말로 정신 병리의 온상이고 정신 이상은 의식의 이상이다.

     우리가 병드는 것은 의식이 무의식의 지혜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의식과 그것을 치료하려는 무의식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의식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신 질환은 개인의 의식적 의지가 하느님의 의지, 즉 무의식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벗어나려고 할 때 일어난다.

 

26. 영적 성장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이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데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즉, 하느님이 아는 만큼 인간도 아는 것이다. 그런데 무의식은 언제나 하느님과 하나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의 목표는 의식적 자아가 신성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다시 정의할 수 있다.

     우리 개개인이 모두 전적으로 완전히 하느님이 되는 것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영적 성장의 목적이란 의식이 무의식에 통합돼 모든 것이 무의식이 된다는 의미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는 이제야 문제의 핵심에 도달했다.

     그것은 의식을 지닌 채로 하느님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무의식의 하느님이란 뿌리에서 자라난 의식의 새싹이 하느님 그 자체로 성장할 수만 있다면,

     하느님은 전혀 새로운 삶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인간 개체의 존재 이유다.

     우리는 의식을 지닌 개인으로서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사는 신이 되고자 태어난 것이다.

 

27. 정계에 오래 몸담은 사람이면 누구나

     최상의 의도로 시작한 일이 결과적으로 해롭게 되어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잘 안다.

     그런가 하면 야비한 동기를 갖고 사악한 씨앗을 뿌리지만 결과적으로 건설적인 일이 되는 경우도 있다.

    

     자녀 양육에도 이런 경우가 많다.

     불순한 이유로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선량한 의도로 행한 나쁜 행동보다 결과적으로 훨씬 나을 때도 있다.

     확신에 차 있을 때 오히려 어둠속에 있고, 가장 혼란스럽다고 생각될 때 오히려 빛 속에 있을 때가 많다는 뜻이다. 

 

28. 무지의 바다를 표류할 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허무에 빠져 "아무 것도 할 수 없어"라고 한다. 그들은 계속 표류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진정한 목표나 의미있는 행선지로 안내하는 어떤 좌표도 찾을 수 없는 망망대해 한복판에 있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댄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 만큼 충분히 깨어있다.

     그래서 보다 위대한 앎의 경지로 나아가 무지에서 자신을 건져 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의 생각이 옳다. 또 그것은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좀 더 위대한 앎의 경지란 어둠속에서 번쩍 불빛이 빛나는 것 같은 깨달음으로 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천천히 조금씩 오며,

     그 조금이라는 것도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물을 관찰하고 탐구하는 각고의 노력끝에 얻어진다.

     그들(위대한 앎의 경지)은 겸손한 학생이다. 영적 성장의 길은 평생 걸리는 배움의 길이다.

 

     열심히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지식의 조각들이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다.

     점차적으로 사물이 의미심장해진다. 막다른 골목과 실망스러운 순간과 폐기해야 할 관념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점차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깊고 깊은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점차 자신이 하는 일이 실제로 어떤 일인지도 자각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권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29. 영적인 힘을 경험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기쁜 일이다.

     어떤 일에 정통했을 때 오는 기쁨이 있다. 

     실제로 전문가가 되어 자신이 하는 일을 진정으로 잘 아는 것보다 큰 만족은 없다.

     영적으로 완전히 성숙한 사람은 인생의 전문가다. 그러나 또 다른 더 큰 즐거움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과 교감하는 즐거움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 때 우리는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동참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의 본질과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의 동기, 결과 및 파급효과에 관해 완전히 앎을 얻게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느님에게만 기대할 수 있었던 수준의 앎에 도달한다.

     우리의 의식적 자아는 하느님의 정신과 결합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처럼 아는 것이다.

 

     이런 단계의 영적 성장과 위대한 인식 상태에 도달한 사람들은 언제나 즐겁고 겸손하다.

     그들은 자신의 비범한 지혜는 무의식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무의식이라는 뿌리와 자신이 연결된 통로를 유념하고 있으며

     그 통로를 따라 지식이 뿌리로부터 흘러온다는 것도 잘 안다.  

     배우려는 노력은 바로 이 연결 통로를 열고자 하는 노력이다.

 

30. 영적인 힘을 경험한다는 것은 분명 즐겁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끔찍한 일이기도 하다.

     더 많이 알수록 어떤 행동으로 돌입하기가 점점 어렵기 때문이다.

   

    (중략) 어린 아이 한 명을 칭찬할 것인가 야단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조차도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제한된 지식에 근거해 행동한 후, 결과는 나몰라라 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더 많이 알수록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 더욱 더 많은 흡수하고 이를 결정에 반영해야 한다.

    많은 것을 알수록 결정 내리기는 복잡해진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결과를 예측하기는 쉬워진다.

 

    (중략) 영적인 힘이란 단순한 앎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보다 위대한 앎의 경지로 나아가면서도 여전히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역량을 유지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하느님과 같은 권능이란 모든 것을 다 알면서 결정을 내리는 힘이다.  

 

31. 영적 진보의 정점에 접근한 사람은 정치권력의 정상에 있는 사람과 비슷하다.

     자기위에 책임을 전가할 사람이나 비난할 사람도, 일을 어떻게 해야할 지 일러줄 사람도 없다.

     자신의 고뇌와 책임을 함께 나눌 만한 수준의 사람이 없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 나는 고독aloneness과 외로움loneliness을 구별하고자 한다.

       외로움은 어느 수준에서든 함께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는 상태다.

       힘이 있는 사람은 그와 대화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외로울 틈이 없고 오히려 외로움이 그리울 수도 있다. 

       그런데 고독은 같은 인식 수준에서 대화할 사람이 없는 상태다.

 

     (중략) 이러한 종류의 고독은 영적 성장을 향한 여정에서 앞서간 자라면 모두가 겪는 것이다.

      이웃에서 점점 멀어짐에 따라 하느님과의 관계는 점점 밀접해진다는 즐거움이 없다면 감당해내기 힘든 짐이다.

      의식이 성숙해지고 하느님을 알아가는 교감속에는 우리를 지탱시켜 주고도 남을 즐거움이 있다.

 

32. 정신 질환의 고통스럽고 달갑지 않은 증상은 은총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즉, '의식의 바깥에 존재하면서 우리의 영적 성장을 돕는 강력한 힘'의 소산이다.

 

    (중략) 우울증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조치가 필요함을 알려주는 표시다.

    (중략) 정신 질환이라는 불유쾌한 증상은 사람들이 길을 잘못 들어섰으며

             정신이 성장을 멈추고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려준다.  

 

33. 증상과 질병은 동일한 현상이 아니다.

     질병은 증상이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생겨난다. 증상은 병이 아니라 치료의 단서다.

     원하지 않아도 증상이 나타난다는 사실은 그것이 은총의 한 양상임을 말해준다.

     이것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무의식이 전하는 메시지다.

     원하기만 하면 자신을 점검하며 재정비할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메시지 말이다.

    

     은총이라는 것이 대개 그렇듯 사람들은 이 선물을 거절하고 그 메시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은총을 거절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결국은 병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도로 모아진다.

     사람들은 자신의 증상이 진짜 증세가 아니고 누구나 '이런 정도는 이따금씩' 겪게 마련이라고 여김으로써

     증상을 무시하려고 한다.

 

     (중략) 자신이 어떤 증상을 갖고 있음을 인정할 때조차도 대개는 여러 가지 교묘한 방법으로 바깥 세상에

     - 무관심한 친척, 가짜 친구, 탐욕스러운 기업, 병든 사회, 심지어 운명에게조차 - 책임을 전가한다.

     자신의 증상을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소수만이 자기 영혼의 혼란이 겉으로 드러난 것임을 깨닫고

     무의식이 주는 메시지와 그 은총을 수용하여 치료에 따르는 고통을 감수한다.

 

34. 신경증은 대체로 성격 장애보다 치료하기 쉬우며 성격 장애는 정신병보다 치료하기 쉽다.

     (중략) 환자 자신의 의지야말로 정신 치료가 성공하는냐 실패하느냐를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35. 그토록 소수의 사람만이 부모에게서 기인한 환경을 극복하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진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믿기로는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주어진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모두를 감싸고 있으며 다른 누구보다 덜 귀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고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우리 대부분은 은총의 부름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 도움을 거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름을 받은 자는 많지만 선택받은 자는 적다"라고 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모든 사람이 은총의 부름을 받지만,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부름에 귀 기울인다"라고 풀이하고 싶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왜 극소수 사람들만이 은총의 부름에 귀 기울이는가?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총에 저항하는가?

     (중략) 그것은 우리의 게으름이다. 즉, 우리 모두에게 저주로 내려진 엔트로피라는 원죄다.

     은총이 진화라는 사다리로 우리를 밀어올리는 궁극적인 힘의 원천이듯이,

     엔트로피는 우리로 하여금 그 힘에 저항하여 지금의 편한 자리에 그냥 머물게 하거나

     아주 적은 힘만 써도 되는, 사다리 아래로 내려가도록 부추긴다.

 

36. 우울증의 근원에 있는 무력감을 떨치기 위해서는, 또한 능력을 발전시키고 유지하려면 깊이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37. (중략) 정신과 의사들은 보통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자주 경험한다.

     심리 치료의 주된 업무중에는 환자를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에 도달하게끔 하는 것뿐만 아니라,

     위로하고 위협하고 엄격하게 구는 등 모든 방법을 적절히 뒤섞어서

     환자가 일단 도달한 그 지점에서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포함된다.

 

38. 우리가 은총에 의해 축복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라고 했다.

     요컨대 은총은 획득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우리가 은총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우리가 차지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은총이 우리를 비껴갈 수 있다.

     그러나 찾으려고 애쓰지 않을 때 우리를 찾아내기도 한다.

 

     (중략) 아마도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스스로의 의지로 은청을 소유할 순 없다 해도

     그것이 기적처럼 올 때 우리 의지로 자신을 열어놓을 수는 있다는 점이다.

 

39. 부처는 애써 해탈하려는 노력을 멈추었을 때 깨달음을 얻었다. 

     해탈이 그에게 오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한 편 그는 해탈을 얻기 전 적어도 16년동안 그것을 찾아 헤맸으며

     16년동안 준비해왔기 때문에 해탈이 그에게로 왔다는 사실 역시 누가 의심할 수 있을까?

 

40. 수동성과 의존성, 두려움과 게으름때문에 가야할 길을 속속들이 미리 보기를 원하며,

     매 발걸음이 안전하고 가치있다는 것을 보장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영적 성장의 여행은 용기와 주체성, 생각과 행동에서의 독립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예언자의 말이나 은총의 조력이 유용하긴 하겠지만 그 길은 반드시 혼자 가야 한다.

     어떠한 스승도 당신을 거기에 데려다줄 수 없다. 확고한 공식도 없다.

     종교 의례는 배움을 위한 보조수단이지 배움 자체는 아니다.  

 

41. (중략) 은총이 실재하고 있음을 일단 깨닫기만 한다면

     자신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생각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과 의식적 의지를 넘어 성장과 진보를 돕는 강력한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자신을 온통 뒤죽박죽 하찮은 존재로 여기는 생각을 뒤집어엎기에 충분하다.

 

     (중략) 은총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실재뿐 아니라

     하느님의 의지가 개개인의 영혼이 성장하는데 쏠려있다는 사실에 관한 명백한 증거다.  

 

 

후기

 

1. 어떻게 하면 치료사의 실력을 판단하고 올바른 치료사를 선택할 수 있는가?

 

    첫번째 해주고 싶은 말은 진지하게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심리 치료는 주요한 투자다. 돈뿐만 아니라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한다. 주식에 비유하면 고위험 투자다.

    만약 제대로 선택하면 당신이 지금까지 꿈꿀 수 없었던 영적 배당금을 두둑히 받을 것이다.

    잘못된 선택을 하면 실제로 해가 될 일은 없지만 당신이 쏟아부은 소중한 돈, 시간, 에너지를 대부분 낭비하게 된다.

 

2. 치료사의 정치적 성향과 나이, 성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진정으로 사랑을 가진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3. 사실 어느 직종에서건 충분히 교육받고 성공한 사람이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면

    대개 그는 가장 훌륭한 전문가이고 믿을 만한 사람이다.  

 

4. 입소문을 당신이 심리 치료사를 찾는 출발지점으로 삼는 것이 좋다.

    당신이 인정하는 친구가 어떤 치료사의 치료를 받고 그 결과에 만족했다면 우선 그를 추천받는 것은 어떤가?

 

5. 심리 치료는 두 사람간에 강도높고 심리적으로 밀착된 관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믿을 만한 특정인을 스스로 선택하는 책임을 대신 져줄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중략) 모든 문제를 감수하면서 심리 치료를 시작한 것은 용감한 행동이므로, 당신에게 존경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