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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이 본 정운찬

라즈니쉬 2006. 12. 22. 00:04

 

<경향신문>정운찬총장께 드리는 苦言 - 2002. 7. 23


“솔직히 두려웠다”. 정운찬 서울대 신임 총장은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받은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정총장의 취임을 보는 나의 소감은 “솔직히 안타깝다”.

미국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교수생활을 하던 정운찬 교수가 모교로 돌아온 1978년, 나는 그 대학에 들어갔다. 해마다 몇 차례씩 휴교 조처가 내려졌던 유신체제 말기에 나는 그에게서 ‘경제학 원론’을 배웠다. 청바지 차림으로 다니면서 학생들에게 깍듯이 경어를 사용했던 정운찬 교수는 진보적 학자도 아니었고 개혁적 지식인도 아니었다. 24년 전 그는, 학문적으로는 정부의 적극적인 거시경제정책과 자율적인 금융시스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케인스주의자였으며, 개인적으로는 상식을 중시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리버럴리스트로 보였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지금까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지식인들 가운데 그를 존경하는 제자가 많은 것은 연구자로서, 또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정교수가 견지해 온 합리적이고 개방적인 태도 때문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는 어떤 부당한 권위도 내세우지 않는다. 여러 가지 면에서 자기와 생각을 달리하는 제자들을 더 귀하게 여기며 껴안아 준다. 한 마디로 대한민국 대학 사회에서 보기 드문 지성인이다.


그러면 정 총장이 서울대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서울대를 잘 이끄는 것이 우리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일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러기가 어렵다. 이것이 내가 그의 총장 취임을 안타깝게 여기는 이유다.


정총장이 이끌어야 할 것은 ‘서울대’라는 교육기관이 아니라 거기에 몸담은 교수들이다.
학생들은 잠시 머물러갈 뿐이며 대학 직원들은 의사 결정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문제는 오로지 교수들이다. 서울대 교수들은 더 많은 국가 재정 지원을 요구한다. 아울러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그 재정을 활용할 수 있는 독립성과 자율성을 원한다. 학생의 전공 선택 범위를 넓히는 모집단위 광역화에 반대한다. 법률과 의학 분야 전문대학원 도입과 학부 폐지에도 부정적이다.
한 마디로 현상 유지를 위협하는 모든 실질적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것이다.
서울대 교수들은, 명문 사립대학에 비해 급여 수준이 현저히 낮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기득권 집단 중 하나이다.


이들은 서울대를 향해 쏟아지는 수많은 질문과 비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법학자나 의학자가 아니라 돈 잘 버는 변호사와 의사가 되려고 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왜 국가가 돈을 써야 하는가. 화가와 피아니스트를 기르는 일을 왜 서울대까지 해야 하는가. 교사가 되려면 누구나 교직과정을 이수하고 임용고시를 통과해야 하는데 사범대학을 따로 유지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정말로 시장에 맡겨서는 안 될 기초학문 분야만 유지하고, ‘장사가 되는’ 모든 단과대학을 독립시키거나 민영화함으로써 모든 학문 분야에 대한 서울대의 전일적 지배를 철폐해서 안 될 이유를 밝혀 보라.
서울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서울대는 사회와 교신할 능력을 상실해 버린 거대한 공룡이다. 사회의 미래와 서울대의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일부 교수들이 나름의 제안을 했지만 서울대 안에서는 작은 메아리조차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누군가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개혁은 바로 그 누군가의 격렬한 반대 때문에 내부에서 좌초하고 만다.
교직원 수첩의 단과대학 배열 순서를 가지고도 싸움이 나는 게 자랑스러운 국립서울대학교의 현실이다. 정운찬 교수는 바로 이런 대학의 총장이 된 것이다.


서울대라는 공룡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남으려면 몸집을 줄이고 지능을 높여야 한다. 그래야 환경 변화에 적응할 수 있다. 자기 개혁 없는 재정 확충과 교수의 복지 증진은 서울대와 대한민국 지식산업을 더 깊은 나락에 몰아넣을 뿐이다. 정운찬 총장이 느낀 ‘두려움’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여기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는 내 처지도 참 안타깝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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