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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영장류가 아니라 파충류(카멜레온)다

라즈니쉬 2006. 2. 12. 16:11
집필자 : 중,고등학교 선생님 - 연영흠  (2006-02-01 22:19) 신고하기 | 이의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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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우리 현대사에서 박정희 씨 만큼 평가가 극과 극을 이루는 인물은 드물 것이다. 한강의 기적을 통해 나라를 기아선상에서 구한 건국 이후 최고의 지도자라는 찬사와  일제 강점기 때에는 왜군 장교, 해방 이후에는 남로당 프락치와 반란수괴로 민족 정기를 더럽힌 파렴치범이라는 비난도 공존한다. 

 

박정희 씨를 지지하는 층에서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공간의 어두운 과거는 민족의 시련기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라는 동정론이 있고, 반대론자들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 모두 왜군 장교가 되거나 남로당의 프락치가 되었던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기도 한다.

 

박정희 씨를 어떻게 보든 관계 없이 그의 행적이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특이했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3개국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5개 국가와 연관 있는 군대 경력이 그렇다.

 

박정희 씨는 일제 강점기 때인 1942년에 일본의 괴뢰 정권인 만주국의 신경(:지금의 )군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그 상으로  194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는 특혜를 받았다. 이어서 해방이 될 때까지 만주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일반적으로 사관학교 생도는 정규 군인으로 인정받고 있고, 당시 만주국이 일본의 괴뢰 정부였던 점을 참작하면 그는 만주군과 일본군으로 동시에 복무한 셈이다.

 

해방이 되자 박정희 씨는 놀라운 변신을 하여 광복군에 가담한다. 왜군 장교라는 원죄를 털어버리려는 그와 국내에 들어가기 전에 세력을 확장하려는 광복군의 시도가 일치한 결과였다.  이렇게 하여 독립 전선의 반대편에 있던 그가 광복군의 이력을 달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의 주인은 광복군이 아니라 미군이었다. 국내에 들어온 박정희 씨는 이것을 간파하고 다시 변신을 거듭한다. 그는  1946년 9월에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2기생으로 입교하여 그 해 12월에 수료하고 국방군(국군) 장교로 임관된다. 이렇게 해서 만주·일본·한국의 3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3개국의 군인을 거치는 그의 경력이 쌓여졌다.

 

그러나  박정희 씨의 변신은 끝나지 않았다. 비록 미군정이라고는 해도 좌익의 집권이 유력시되던 시점이었다. 만주군(일본군)으로, 광복군으로 출세를 좇아가던 그가 좌익과 손을 잡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는 지도 모른다. (그가 의도적으로 남로당에 접근했는지, 남로당의 마수에 걸린 것인 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당시 그는 성인이었다. 어떤 경우든 관계없이 남로당에 관계한 잘못은 그의 책임이다.)

 

박정희 씨가 남로당 군사부 안에서 어떤 위체에 있었는 지는 상세하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일설에는 그가 남로당이 군부 안에 심어놓은 프락치의 총책이었다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그의 남로당 관계 기록은 그의 집권 중 철저하게 말살.). 다만 그는 남로당의 군사부 총책 이재복과 직접 연결된 심복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정식 군인은 아니라도 북한의 지령을 받는 북한군(인민군)이 된 것이다.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 씨는 여순 반란 사건을 토벌하고 서울로 복귀한 뒤인 1948년 11월11일에 남로당 프락치 혐의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그를 체포한 사람은 한국 현대사에서 악명이 높은 김창룡(金昌龍)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씨는 또 한 번의 변신으로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군부 안의 좌익을 색출하는 숙군수사에 적극 협력했기 때문이다. 그가 변신하게 된 동기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를 지지하는 측에서는 '박 씨의 뛰어난 능력(3개국 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을 인정한 군수뇌부의 설득'에 의해서라고 하고, 그를 비판하는 측에서는 '고비마다 원칙이나 정의보다는 이해타산을 계산하고 변신하는 본능'에 의해서라고 보고 있다. 

 

군수사 기관에 체포된 박정희 씨는 한 때 동지였던 군부 내 남로당 조직원들의 명단을 모두 털어놓았다. 김창룡은 이미 이재복의 비서 김영식(金永植)을 체포해 군부 안 남로당 프락치의 명단을 상당히 확보했었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를 못 갖고 있는 차에 박정희 씨의 증언으로 확증을 얻어 고구마 캐듯 좌익 세포를 줄줄이 캐낸 것이었다.

 

박정희 씨는 일단 기소돼 사형을 구형받았지만, 동지들을 밀고한 공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비록 군복을 벗어야 했지만, 형 집행을 면제받는 파격적 대우를 받았고, 육군본부 정보국에 직제에도 없는 비공식문관으로 복직해 기밀비에서 월급을 받았다. 이어서 한국전쟁이 터진 뒤 다시 대한민국의 현역 장교로 복귀했다.

 

한국전쟁 동안 한국군은 유엔군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한국군 장교였던 박정희 씨는 자동적으로 유엔군의 일원이 되었다. 그에게 새로운 경력이 추가된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씨의 변신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자신을 용서해준 정부에 총을 겨누는 반란군이 되었고, 쿠데타의 성공으로 다시 대한민국 군인의 신분이 되었다.

 

한편, 그의 대통령 재임 시인 1968년 4월 1일에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다. 대통령이었던 그는 당연히 향토예비군의 사령관이었다. 또 하나의 군 경력이 추가된 셈이다.

 

박정희 씨는 우리 역사의 짧은 격동기에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3개국 (만주, 일본, 한국)의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5개국(만주, 일본, 상하이 임시정부, 남한, 북한) 군대와 관련을 맺었던 인물이 세계사에 또 있을까? 그의 군 경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만주군(신경군관학교)-일본군(일본육사)-만주군(중위)-광복군(해방후 일시)-국군(조선경비사관학교 졸업과 임관)-인민군(남로당 프락치)-국군(한국전쟁으로 복귀)-유엔군(국군통수권 유엔군 이관)-국군(한국전 종전)-반란군(5·16쿠데타)-국군(반란성공)-예비군(대통령으롯 국군 통수권자)

 

박정희 씨를 찬미하는 자들은 흔히 박정희를 용인술의 천재라고 칭송한다. 하지만, 그를 반대하는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여 변신을 거듭하는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한다.  그런 일생을 말해주듯 그는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자신의 왼팔과 오른팔 격인 김재규 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장 등과  술을 마시다가 왼팔의 총에 맞아 오른팔과 함께 절명했다.

 

  (네이버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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