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법률

법리와 상식사이

라즈니쉬 2014. 2. 21. 19:53

 

[마감 후] 법리와 상식 사이   입력 : 2014-02-20 21:08:11수정 : 2014-02-20 21:13:01
김준기 사회부 차장

 

2004년 10월21일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위헌 결정을 내렸다. 노무현 정부는 서울에 집중돼 있는 주요 정부기관을 지방으로 옮겨 국가 균형발전을 이루자는 취지로 신행정수도 건설을 추진했지만 ‘천도’ 논란을 일으키며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그 배경에는 노무현 정부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정치적 비토세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헌재가 밝힌 위헌의 근거는 “대한민국 수도가 서울이라는 사실은 성문헌법과 같은 지위와 효력을 가진 ‘관습헌법’이다. 수도 이전을 위해서는 국민투표를 통한 헌법 개정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선왕조 창건 이후 600년 동안 서울이 수도였고, 조선시대 헌법인 경국대전도 서울을 수도로 규정했다는 논리를 댔다.

‘관습헌법’은 참으로 생소한 개념이었다. 법률 전문가들은 정교하게 구성된 성문헌법이 있는 한국에서 관습헌법은 성립할 수 없다며 헌재의 논리를 비판했다. 많은 국민들에게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법리였다. “앞으로 법을 만들 때는 경국대전부터 뒤져야 한다” “조선시대 이후 남자만 대통령(왕)을 했으니 여자 대통령 나오려면 헌법을 고쳐야 한다”는 말들이 나왔다. 성매매 업주들은 “수천년 동안 관습적으로 허용해온 성매매를 인정하라”며 성매매처벌특별법의 철회를 요구했다.

재판 결과가 상식과 어긋나 보이는 상황은 발생할 수도 있다. 판결은 법률과 법관의 양심에 따라 이뤄지지만 그래도 우선시되는 것은 법 조항이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지난달 18일 통상임금의 범위에 대한 판결에서 노사가 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키로 합의했더라도 이는 근로기준법에 위반돼 무효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노동자들이 무효화된 과거 통상임금 합의에 따라 차액을 추가임금으로 청구할 때 기업 경영에 막대한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면 청구를 용인할 수 없다는 단서를 달았다.

대법원이 단서를 붙이면서 근거로 든 것은 민법 제2조에 있는 ‘신의칙’이라는 법리다. 같은 말인 ‘신의성실의 원리(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라고 하면 알아듣는 사람들이 조금 더 늘어날까. 이미 노사가 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키로 합의했다면 비록 이것이 위법이라 해도 기업이 어려워질 것이 우려되면 당초 합의한 것에 대한 ‘신의’를 지켜 노동자들은 부당하게 못 받은 임금을 요구하지 말라는 논리다. 기업 편만 들어준 판결이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서울고법이 지난 12일 1500여억원의 배임 혐의 등으로 원심에서 실형 4년을 선고받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해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자 형법 제39조의 ‘후단(사후적) 경합범’이라는 법리가 동원됐다. 한 사람이 여러 죄를 지었을 때 나중에 지은 죄(김 회장의 경우 2007년 폭행사건)로 먼저 처벌을 한 뒤, 그 이전 범죄(2004~2005년 배임)가 드러나 기소되면 앞서 받은 처벌을 감안해 형을 감경해줄 수 있다는 법리다.

법관들은 법전 구석에 숨어 있는 법리를 찾아내 새로운 판례를 세우는 것에 보람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러나 특정 결론을 미리 세워놓고, 이를 뒷받침할 법리를 찾아 갖다붙인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면 재판 결과는 신뢰를 주기 어렵다. 최근 사법부가 국민들의 신뢰 상실을 걱정하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사회적 분쟁의 마지막 해결장인 사법부가 신뢰를 잃는 것은 우리 사회의 기초골격이 흔들리는 심각한 상황이다. 기발한 법리를 찾아내는 것만큼 법리와 상식의 괴리를 최소화하려는 노력도 사법부가 신뢰를 얻는 데 필수요소다. 

 

출처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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