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들의 분신처럼 종교인의 자살은 순교와 구별하기 어렵다.
탄압받는 정치지도자의 자살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자살은 열사의 저항으로만 간주된다.
자살에 대한 사회적 통념인 나약함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박쥐>의 유명한 대사,
가톨릭 신부인 주인공 상현(송강호)의 기도는 그 경계를 허무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기도문에는 개인의 우울과 신앙인의 헌신이 혼재되어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처럼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
사지가 절단된 환자와 같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하시고 두 뺨을 떼어내어 그 위로 눈물이 흐를 수 없도록 하시고…
손톱과 발톱을 뽑아내어 아주 작은 것도 움켜쥘 수 없고… 머리에 종양이 든 환자처럼 올바른 지력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영원히 순결에 바쳐진 부분을 능욕하여 어떤 자부심도 갖지 못하게 하시며 저를 치욕 속에 있게 하소서.
아무도 저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게 하시고….” 이는 성서의 내용이 아니라 시나리오를 쓴 작가와 감독의 창작이라고 한다.
1970년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제정하라”가 아니다)를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죽음은 저항이지 자살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살은 상대방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자신을 해치는 약자의 투쟁 방식이다.
결국 ‘적’의 몸은 그대로이고 저항한 사람은 열사가 되면서 삶에서는 사라진다.
‘못된 강자’는 실익을, ‘선한 약자’는 명예를 추구하는 것. 지배가 작동하는 중요한 방식 중 하나다.
통치세력은 망각과 비난의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 이 사건을 다양한 시각에서 조명하는 단행본 기획이 있었다.
나도 원고를 청탁받았다. 나는 노 전 대통령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정치인의 자살과 우울증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당시만 해도 주변의 만류에다 자기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나는 결국 포기했다.
“대통령은 자살해서는 안되는 사람”이라는 내 아버지 말처럼, 자살에 대한 사회적 금기와 ‘나약한 사람의 도피’라는 통념은
‘가해세력’이 고인을 공격하는 최대 무기였다. 나는 아버지에게 되물었다.
“대통령은 교통사고 당하면 안되나요? 대통령은 암에 걸리면 안되나요? 우울증은 질병일 뿐이고 자살은 그 병에 걸린 사람이 죽는 것,
그냥 병사(病死)예요.” 나는 아버지와 크게 싸웠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아버지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고 아버지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영화 <변호인>을 보지 않았다. 보기 싫었다.
친구들에게는 “내가 좋아하는 ‘꽃미남’ 배우가 맡은 역할이 맘에 안 들어서”라고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전(前)정권에 대한 분노로 또다시 고통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의 죽음은 완벽한 타살이다. 그러나 이 타살의 형식은 복잡하다.
정신과 의사 등 많은 전문가들은 그의 죽음을 사회적 억압으로 인한 우울증, 자살이라고 본다.
그 상황에서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반사회적이거나 극도의 후안무치가 아니라면, 아프고 통증에 시달리는 것이 정상적인 몸의 반응이다.
진짜 문제는 우울증과 자살에 대한 편견이지 그의 행위가 아니다.
심리학의 상식에서 스트레스 척도는 그 자체의 강도보다 그것에 반응하는 사람의 내성(耐性)에 의해 좌우된다.
이 논리는 스트레스 주는 사람이 문제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피해자의 선택과 역량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개인이 정치인, 그것도 어떤 가치나 캐릭터를 상징하는 정치지도자일 경우 선택은 매우 제한적이다.
우울증의 원인과 증세는 다양하지만, 그는 압도적인 힘으로 들이닥친 고도로 지능적인 정치적 의도에 의해 강제로
‘질병을 주입당했고’ 그의 증상은 ‘미래의 불행에 대한 확신’이었다.
강한 사람만 살아남는다? 이것이 그를 살해한 우리 사회 일부 집단이 강조하는 바고, 지금 ‘우리’를 통제하는 방식이다.
나는 그를 강인한 지도자로만 간직하고 싶은 민초들의 강자 지향 심리를 ‘그들’이 십분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열정적인 변호인이었던 그가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개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동시에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들과 공모하는 셈이 된다.
보수세력은 그가 나약해서 자살했다고 약자 혐오를 정당화했고, 진보진영은 정권의 탄압에 대한 저항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나약함으로서의 저항’을 주장한다. 그것이, 재임 당시 공과와 별개로, 그가 추구했던 약자에 대한 애정에 동참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강인한 지도자라는 사실과 우울증이라는 질병의 희생자라는 사건이 왜 양립하면 안되는가?
개인적 자살과 정치적 열사(烈死), 영웅과 피해자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고 구별되어서도 안된다.
그 경계를 인식하고 허무는 것이, 정의롭고 치열한 승부사였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움의 고통을 안겨준 그를
영원히 기억하는 방식이 아닐까.
<경향신문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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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자신의 죽음으로 국민들을 각성시키려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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