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데뷔한 지 5년이 되었다.
경력 5년 차라는 건 신인작가라고 하기엔 후배들에게 미안하고 기성작가라고 하기엔 스스로 민망한,
조금은 애매한 시기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도 초등학교를 제외하면 5년이라는 시간은 모든 종류의 학습 코스를 끝낼 수 있는 시간이다.
나도 슬슬 ‘작가로 데뷔하기’에서 졸업해서 ‘작가로 살아가기’에 대한 생각과 배움을 얻어가는 것 같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곱씹게 된 것 중 하나는 입장정리에 대한 생각이다.
요즈음 나는 세 가지 종류의 글을 쓰고 있다. 하나는 라디오 오프닝. 매우 짧지만 매일 써야 한다.
두 번째는 이웃집 만화가 종범씨. 보다 길고 정리되어야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만 쓰면 된다.
세 번째는 만화스토리. 길고 어렵다. 고민되며 오래 걸린다.
이 세 가지 글 사이를 왕복하다 보니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에 있어서 ‘작가의 입장정리’는 매우 핵심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먼저 가벼운 생각들을 라디오 오프닝으로 쓴다.
그리고 그중 내 마음을 끄는 꼭지에 대해서 생각이나 고민을 밀고 나아가다 보면 그에 대한 나의 입장, 내 의견 같은 것들이 정리가 되곤 한다. 그런 것들은 에세이로 만들어본다. 그러다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이야기가 있다면, 만화를 위한 이야기로 만들어본다.
내 의견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훨씬 더 설득력을 품을 수 있도록 고민하고 고쳐 쓴다.
교묘한 장치도 만들어보고 행동이나 대사에 내 입장을 숨겨두기도 한다.
글의 성격은 모두 다르지만, 한 가지는 동일하다.
내 의견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
작가마다 다양한 지점을 중시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작가는 발상을, 어떤 작가는 정서를, 또 어떤 작가는 캐릭터의 입체성을 중시한다.
그리고 나는 테마를 중시한다. 테마는 소재에 대한 나의 입장이다.
예를 들어서 요리를 소재로 삼아 이야기를 쓴다고 상상해본다.
요리에 대해서도 누군가는 입장이라는 것을 갖고 있다. 보통 한두 줄짜리 입장에 불과하겠지만(요리는 즐거움이다,
혹은 요리는 귀찮음이다 정도?) 그것을 소재로 삼은 이상, 고민을 밀고 나아가본다.
무엇이 요리일까. 이건 요리인가. 저건 아닌가. 요리와 사료의 차이는 뭘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다 보면 요리에 대한 나의 입장이 점점 두께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요리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의 씨앗이 된다.
만약, 요리라는 것이 내 삶에 있어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 이 고민의 과정이 정말 고통스럽지만,
반대로 매우 중요한 소재라면 이 과정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도 한다.
요리사에게는 아마 그럴 것이다. (따라서, 별로 중요한 것이 없는 시큰둥한 사람은 작가라는 직업에 그다지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방식을 거쳐서 작가라는 존재는 수많은 ‘관’들을 갖게 된다.
관이라는 글자는 어떠한 단어에도 붙을 수가 있다.
인간관, 종교관, 예술관, 결혼관 같은 말은 많이 쓰는 용례이고 볼펜관, 자동차부품관, 보도블럭관 같은 말 역시 생소하지만 가능하다.
이 관이라는 글자는 ‘본다(觀)’는 뜻이다. 즉, 내가 보는 입장이라는 의미다.
누군가가 만화가 무엇인지 입장을 정리하면 그는 만화관을 갖게 된다.
그런 식으로 인간관, 친구관, 사랑관, 예술관을 갖게 되고 따라서 볼펜장인에게는 볼펜관이, 자동차 정비기사에게는 자동차부품관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들은 각각 하나의 테마가 되어 작가가 이야기를 끝까지 밀고 나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마무리를 제시해준다.
물론 그렇게 다듬어진 입장은 또 언젠가 바뀔 수도 있겠지만, 잠정적인 현재의 결론이나 의견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면 또 다른 작품을 만들면 되니까.
5년밖에 안 된 작가가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글을 쓸 때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위에서 쓴 것처럼, 잠정적인 결론에도 의미는 있으니까 이런 글을 뻔뻔하게 쓰고 있다.
내게 있어서는 중요한 것에 대해서 생각을 계속한다는 것. 집요하게, 일부러 스스로에게 반대 의견을 내면서 지속한다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한 입장과 결론을 세우고 수정했다가 정리한다는 것.
이것이 작가로 계속해서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이다.
문장으로 정리하고 보니 참 일상적인 일일 수도 있고 지극히 작가적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아직 멀었지만 이것이 지금 나의 잠정적인 결론이다.
이종범
<닥터 프로스트> 작가로 일 벌이길 좋아하는 참치형 만화가.
덕력과 잉여력의 위대함을 신봉하지만 정작 본인은 마감 좀비.
'글쓰기 작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판석 감독 (0) | 2014.06.07 |
---|---|
작사가 (0) | 2014.05.24 |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 - 정희진 (0) | 2013.05.06 |
[스크랩] “나만 망할지도 몰라 두달이나 고민했어요” (0) | 2012.08.18 |
시나리오 작법 (0) | 2011.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