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러시아 시인 Lermontov에 관하여

라즈니쉬 2010. 1. 17. 23:23


 

레르몬토프 [Lermontov, Mikhail (Yuryevich), 1814.10.15~1841.7.27]

러시아의 시인 ·소설가. 

모스크바 출생. 1828년 모스크바대학 부속 귀족학교 4학년에 입학, 실러 ·셰익스피어 ·푸시킨의 작품을 탐독하면서 시를 짓기 시작하여 최초의 서사시 《체르케스인()들》(1828) 《캅카스의 포로》(1829)를 썼다. 1830년에 정식으로 모스크바대학 정치과에 들어가 독서와 시작()에 빠졌다. 이 시절에 희곡 《에스파냐 사람》(1830) 《연인》(1831), 서사시 《자유의 마지막 아이》(1831), 서정시 《모놀로그》(1829) 《파리─6월 30일》(1830) 《그 날이 와서…》(1831) 등을 썼다.

1832년에 모스크바대학을 중퇴하고 페테르부르크 근위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이 때 미완의 소설 《와짐》(1833∼1834)을 썼는데, 이것은 러시아의 역사에서 취재한 것으로 서민의 분노를 긍정하는 내용이었다. 1834년에 학교를 졸업하자 청년사관이 되었으며, 서사시 《악마》(1829∼1841)를 계속 집필하면서 그 사이에 《귀족 오르샤》(1835), 희곡 《가면무도회》 등을 썼다.

다시 미완의 소설 《리고프스카야 공작부인》(1836)에서는 수도의 하급관리의 애절한 생활을 그렸는데, 이것은 고골이 시작한 자연파의 방향에 대응한 것이었다. 1837년 푸시킨이 결투로 비명에 죽자, 그의 죽음에 붙여서 쓴 《시인의 죽음에》에 의하여 유명해졌으나, 이 작품으로 말미암아 정부와 상류사회의 음모를 폭로하였기 때문에 캅카스로 좌천당하였다.

이 곳에서 대표적 서사시 《도망자》(1838) 《무티리》(1839) 《악마》(1841)를 집필하였다. 1839∼1840년에 발표한 연작소설 《현대의 영웅》은 이른바 레르몬토프의 사상과 작품계열의 집대성으로 그 주인공 페초린의 악마적 풍모는 1830년대 지성적인 귀족의 환멸과 반항의 형상이며, 러시아 문학사상 전통적인 ‘잉여자()’ 타입의 결정판이었다. 이것은 푸시킨의 《오네긴》과 더불어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고전으로 평가되었다.

전제정치를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해 온 그는 세 차례나 캅카스로 유배되었고, 1841년 7월 15일 퍄티고르스크에서 천성인 독설 때문에 일찍이 학우였던 N.S.마르티노프 소령과 결투하여 27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 출처 Naver

 

개요

1814. 10. 15(구력 10. 3) 모스크바~1841. 7. 27(구력 7. 15) 러시아 퍄티고르스크.

러시아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시인·소설가.

그의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 Geroy nashego vremeni〉(1840)은 뒷세대 러시아 작가들에게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생애

아버지 유리 페트로비치 레르몬토프는 퇴역 육군 대위였으며 어머니 마리야 미하일로브나의 결혼 전 성(姓)은 아르세니예바였다. 그는 3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펜젠스카야 현(縣)에 있는 외할머니 옐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 아르세니예바의 영지에서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러시아의 풍부한 자연의 아름다움, 민요와 민담들, 관습과 의례, 농노들의 고된 노동, 농민공동체의 이야기와 전설 등은 모두 이 미래 시인의 성격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어릴 때 자주 앓았으므로 3번이나 카프카스의 온천으로 보내졌고, 카프카스의 이국적 풍경은 그에게 길이 남을 감동을 주었다.

외할머니와 모스크바로 이사한 1827년부터 그는 모스크바대학교의 귀족 자녀를 위한 기숙학교에 다니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고 그림도 공부했다. 1828년에는 당시 젊은 러시아 작가들을 사로잡았던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인 바이런을 흉내내어 시 〈체르케스인들 Cherkesy〉·〈카프카스의 포로 Kavkazsky plennik〉를 썼다. 2년 뒤에는 첫번째 시집 〈봄 Vesna〉을 출판했고 같은 해에 모스크바대학교에 입학했다. 이 무렵 모스크바대학교는 활기 넘치는 문화와 사상의 중심지로서 알렉산드르 게르첸, 니콜라이 플라토노비치 오가료프를 비롯한 민주적 사상을 지닌 여러 귀족 출신 청년들이 공부하던 곳이었다. 학생들은 정치적·철학적 문제들과 농노들의 비참한 삶, 데카브리스트 봉기 등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는 많은 서정시와 긴 담시(譚詩), 희곡을 썼다. 희곡 〈이상한 남자 Stranny chelovek〉(1831)는 학생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농노제와 차르 체제에 대한 증오를 반영하고 있다. 1832년, 반동적인 한 교수와 심하게 충돌한 뒤 학교를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834년 기수(旗手)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의 차르스코예셀로에 주둔해 있던 후사르 근위기병연대로 배치받았다. 젊은 장교가 된 그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귀족생활에 대한 비판적 관찰을 바탕으로 희곡 〈가장무도회 Maskarad〉(1835, 출간 1842)를 썼다. 이 시기에 겪은 짝사랑, 바르바라 로푸히나를 향한 애정은 〈리고프스카야 공작부인 Knyaginya Ligovskaya〉 등 여러 작품에 나타난다.

레르몬토프는 1837년 1월, 위대한 시인 알렉산드르 푸슈킨이 결투로 죽었다는 소식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죽은 시인에 대한 러시아 민족의 사랑을 표현한 비가에서 푸슈킨을 죽인 사람뿐 아니라 자유의 사형집행인이자 이 비극의 진정한 피고였던 귀족사회를 규탄했다. 이 시가 니콜라이 1세의 궁정에 알려지자마자 그는 곧 체포당해 카프카스에 주둔한 연대로 유배되었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과 카프카스에 유배당한 데카브리스트와의 만남, 티플리스(지금의 트빌리시)에서 탁월한 그루지야 시인들을 소개받고, 또 유명한 러시아 극작가이자 시인·외교관인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그리보예도프에게 딸을 시집보낸 저명한 시인 일리아 차프차바제를 비롯한 여러 그루지야 인텔리겐치아와 알게 된 모든 일들은 그의 경험의 폭을 넓혀주었다. 카프카스의 자연과 시가(詩歌)에 매료당하고 그곳의 민간전승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 그는 그 지방 언어를 공부했고, 아제르바이잔 동화 〈아시크 케리브 Ashik kerib〉를 우아한 문체로 번역했다. 카프카스를 다룬 이미지는 그가 그린 스케치와 회화, 그리고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 및 여러 시에서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외할머니가 여러모로 열심히 애쓰고 유력한 시인 V.A. 주코프스키가 도와준 덕택에 그는 1838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의 시집이 출판되기 시작하여 낭만주의 시 〈차르 이반 바실리예비치와 젊은 근위병, 그리고 씩씩한 상인 칼라슈니코프에 관한 노래 Pesnya pro tsarya Ivana Vasilyevicha, molodogo oprichnika i udalogo kuptsa Kalashnikova〉(1837)와 사실주의적 풍자시 〈탐보프의 회계원 마누라 Tambovskaya kaznacheysha〉(1838)·〈샤슈카 Shashka〉(1839, 출판 1862), 낭만주의 시 〈악마 Demon〉 등이 잇따라 나왔다. 그는 곧 인기를 얻어 푸슈킨의 후계자라 불렸으며 자유주의적 시를 썼다는 이유로 탄압받고 유배당한 경력 때문에 더욱 추앙받았다. 많은 작가들과 언론인들은 그에게 관심을 기울였고 사교계의 숙녀들은 그에게 매혹당했다. 그는 사실주의자들의 대표적 잡지였던 〈조국일지 Otechestvennye zapiski〉의 몇몇 편집자를 친구로 사귀었으며, 1840년엔 그를 러시아 문학의 위대한 희망으로 여긴 탁월한 진보적 비평가 V.G. 벨린스키를 만났다. 레르몬토프는 이제 상트페테르부르크 문학계에서 명성을 얻은 것이다.

1830년대말에 이르러 그는 창작의 기본방향을 확립했다. 자유를 사랑하는 감정과 시대에 대한 매우 회의적인 평가는 철학적 서정시 〈생각 Duma〉·〈자신을 믿지 말라…… Ner ver sebye……〉로 형상화되었고, 〈므치리 Mtsyri〉와 죽을 때까지 계속 써나간 〈악마〉 같은 카프카스풍 시의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에서 독창적인 방법으로 해석되었다. 마침내 레르몬토프는 성숙한 산문인 〈우리 시대의 영웅〉에서 동시대 사회와 그 세대의 운명을 바라보는 그의 견해를 종합하여 동시대인들의 삶에 관한 비판적인 초상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페초린은 모든 것을 경험해본 최고의 교양을 갖춘 냉소적 인간으로, 인간의 처지를 시험하는 데 몰두한다. 이 사실주의 소설은 사회적·심리학적 내용으로 가득 차 있으며 훌륭한 문체로 씌어 있어 러시아 산문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40년 2월, 레르몬토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프랑스 대사의 아들과 결투했다는 죄목으로 군사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 결투는 이 반항적인 시인을 벌주기 위해 꾸민 사건이었다. 그는 니콜라이 1세의 명령에 따라 다시 카프카스 유배를 선고받았으며 이번에는 위험한 군사작전을 준비중인 보병연대로 배치되었다. 명령에 쫓겨 곧 기병대의 출격에 참가했고 백병전에서도 싸워야 했다. 그러나 발레리크 강의 힘겨운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으며 이 경험을 〈발레리크 강 Valerik〉·〈당신께 편지를 쓴다…… Ya k vam pishu…〉라는 시로 표현했다. 사령관은 이 시인 장교가 보여준 위대한 용기와 정신력을 치하하는 정당한 보고서를 올렸다.

외할머니가 끈질기게 요청한 결과로 레르몬토프는 1841년 2월 잠시 카프카스를 떠날 기회를 얻었다. 그는 수도에서 몇 주 동안 머무르면서 이미 착수했던 몇 편의 시를 계속 써나갔다. 이 시들은 그의 사상과 재능이 성숙했음을 보여주는 〈조국 Rodina〉·〈지난날 나는 사랑했노라 Lyubil i ya v bylye gody〉 등이다. 그는 자신의 잡지를 펴낼 계획으로 새 소설을 구상하고 벨린스키에게 비평을 부탁했다. 그러나 곧 연대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아 우울한 예감에 싸여 길을 떠났다. 카프카스로 가는 이 긴 여행 동안 그는 창조력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마지막 노트에는 〈절벽 Utes〉·〈싸움 Spor〉·〈만남 Svidanye〉·〈나뭇잎 Listok〉·〈아니, 내가 그토록 사랑한 사람은 네가 아니다 Net, ne tebya tak pylko ya lyublyu〉·〈홀로 길을 떠난다…… Vykhozhu odin ya na dorogu……〉·〈예언자 Prorok〉 같은 그의 최후의 작품이자 러시아 서정시의 걸작들이 기록되어 있다.

레르몬토프는 연대로 돌아가는 길에 휴양도시인 퍄티고르스크에서 꾸물거렸다. 이곳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돈 많은 상류사회 젊은이들을 만났는데, 그 가운데는 궁정 사교계에서 그의 명성을 익히 들어 은근히 그의 불행을 바라는 사람도 있었다. 몇몇 젊은이는 그의 독설을 두려워했으며 어떤 이는 그의 명성을 시기했다. 그의 주위에는 음모와 추문, 증오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마침내 레르몬토프와 N.S. 마르티노프라는 장교와 말다툼이 벌어졌다. 두 사람은 결투로써 승부를 지으려 했고 결투는 시인의 죽음으로 끝났다. 이틀 뒤 유해는 시립 묘지에 묻혔으며 도시의 모든 시민들이 장례식에 모여들었다. 나중에 그의 관은 타르하나 영지로 이관되었고 1842년 4월 23일에 아르세니예프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

평가

겨우 27세의 나이로 죽은 레르몬토프는 재능있고 탁월한 사상가·시인·산문작가·극작가이자 푸슈킨의 후계자였으며 러시아 문학에서 가장 훌륭한 전통의 대표자로서 자기 가치를 증명했다. 청년다운 기질이 나타난 그의 서정시들은 자유를 향한 열정적 갈망으로 가득 차 있고 자기 삶의 과업에 자기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통스러운 사색과 투쟁에의 호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영웅적 행위를 꿈꾸고 있다. 그는 여러 정치사건과 '차르의 제관이 떨어질' 시간을 가르쳐주었던 1830년대의 농민반란으로 깊이 고민했다. 서유럽의 혁명적 운동에 대해서도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을 다룬 시를 쓰는 등 열광적으로 반응했으며 〈샤슈카〉 같은 후기작품에서도 프랑스 혁명을 주제로 다루었다.

레르몬토프의 작품은 러시아 역사의 영웅시적 전통과 푸슈킨 시대의 낭만적 시, 바이런의 영향 등이 밑거름이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1830년대의 역사적 실재성에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바이런주의 또한 그의 특별한 재능을 만족시켜 주었다. 왜냐하면 그의 열정적 이상을 표현하고 작품의 중심 주제인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르몬토프의 낭만주의는 세계에 대한 사실주의적 인식도 갖추고 있다. 이는 특히 역사적 사건이나 사실적 주제에 바탕을 둔 시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그는 초기작품에 자주 사용했던 낭만적 시구와 이미지를 하나씩 버려나갔고 마침내 이것은 '거짓된 금박'이며 '귀먹은 언어'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내용이 풍부하기로 유명한 후기작품에서는 현실에 대한 낭만적 접근이 사라지고 객관적 묘사가 두드러지며 특정한 사회상황, 일상생활, 민중 속에서 찾아낸 등장인물이 재현된다.

그의 시에서는 주관적이고 매우 개인적인 모티프뿐 아니라 시민적이고 철학적인 테마가 밀접하게 엮여 있다. 그는 러시아 시에서 영웅적 음성과 강렬한 표현력이 두드러지는 '강철 시' 억양을 처음 사용했고 미래를 향한 열정으로 러시아 사회의 영적 요구에 부응했다. 레르몬토프가 남긴 유산은 러시아 여러 미술가·작곡가·연극인·영화인 들의 작품에서 다양하게 해석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극적인 구성은 연극의 발달에 지대한 역할을 했으며 그의 삶은 많은 소설·시·영화의 소재로 쓰여왔다.

V.V. Zhdanov 글 | 吳叔恩 옮김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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