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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순과 안진경

라즈니쉬 2010. 10. 10. 01:08


1. 구양순

구양순(歐陽詢). 隋나라의 유명한 서예가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楷法(해법)의 極則이라고 칭송을 받았던 楷書의 대가이다. 부친은 통일 이전의 남북조시대 陳나라의 광주자사였으며 수나라의 침공을 받으며 함락되면서 반역자로서 처형되었다. 歐陽詢 자신도 키가 작고 못생겨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는 등 어려서부터 불행한 환경을 참고 견디며 자라왔으나 머리는유달리 총명하여 학문이 매우 뛰어 났다. 수나라 때 관리에 입문하여 수양제 때에는 국가의 의전과 제사를 주관하는 태상박사에 임명되었다. 젊었을 때부터 서예에 능하여 고려에 까지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다. 서풍은 왕희지 이래의 정통파 흐름을 이어 받았고 특히 해서에 뛰어 났다.이후 唐나라 조정에도 계속 발탁되어 급사중,태자솔경령,홍문관학사 등을 지냈다. 

2. 구양순과 구성궁 예천명



구앙순은 남조의 양인으로 왕희지의 서법을 배우고 다시 북조의 웅건한 필치를 흡수하여 스
스로의 독특한 풍격을 창출한 서예가이다. 당초의 저수량, 우세남과 함께 삼대가로 불리며
중당의 안진경을 포함하여 사대가로 부른다. 구양순이 쓴 비석 글씨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구성궁예천명 등이 있다. 구성궁의 글자는 그 결구가 완전히 전통 서법을 타
파하고 정상적인 구양순의 창조정신이 가장 강렬하게 나타나 있다. 구양순은 점획 방면에
더욱 천변 만화를 하였으니 연결된 점 또는 점이 많은 글자들에 있어서는 모든 점들의 크기
와 모양을 다르게 하였으며 또한 많은 가로획과 세로획도 변화를 주었다. 서로 같은 글자도
변화를 많이 주었으니 예를 들면 (갈 지)자와 (아니 불)자 등을 쓰는 법이 각각 서로 달랐
다. 이외에 가장 큰 특징은 그가 예술적인 과장법을 잘 사용하였다. 예를들면 필획이 많은
글자를 쓸 때는 점을 크게 하였으며 반대로 필획이 적은 글자는 조 금 작게 하는 것이 일반
적인 규율인데, 그는 크게 해야 할 글자는 특별히 더욱 크게 하고 더 작아야 할 글자는 더
욱 작게 하였다. 그리고 자형이 본래 긴 것도 특별히 더 길게 하였으며 본래 넙적한 것도
더욱 과장하여 넓적하게 하였다. 이렇게 그는 특별히 글자를 과장하여 크고 작고 또는, 길고
넙적하게 만든 것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글자의 중간에 섞여 있어서
얼른보면 모두가 고르게 보여 혼란함을 야기시키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예술적 과장이면서
동시에 그의 진면목이기도 하다. 시험삼아 구성궁 본문에 있는 (尹.生.萬.物)의 네자를 놓고
볼 때 (윤)자는 네모지고, (생)자는 작고, (만) 자는 길고, (물)자는넙적하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이렇게 네 자가 모두 장단이나 대소가 일정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어 고른
균형을 나타내어 하나의 점이라도 돌출되거나 위축되지 않고 있다.
구양순의 자는 신본이다. 그는 진의 초에 출생하여 수를 거쳐서 뒤에 당인이 되었는데 당
이전의 글씨는 남아있지 않다. 구성궁예천명은 구서의 대표작으로 서기 632년에 썼으며 전
문이 24행이고 매행 50자이다. 과거의 평자들은 하도사비와 비교하여 특히 결구에 있어서
백중으로 보았는데 이 비는 아무래도 칙명(조서)으로 썼으므로 일점일획에 소홀 함이 없는
근신(삼간 것)한 것이어서 해법의 극도로 여겨져 왔다.


3. 안진경
709 경조(京兆) 만년(萬年: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시안[西安])~785.
중국 당대(唐代)의 서예가.
자는 청신(淸臣). 안사(安史)의 난과 이희열(李希烈)의 난 때 큰 공을 세웠으나 난중에 순국했다. 공훈과 예술적인 재능으로 인해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남북조시대 이래로 그의 선조 가운데 안등지(顔騰之)·안지추(顔之推)·안사고(顔師古)·안근례(安勤禮) 등이 모두 고문자학(古文字學)을 연구했고 서예에도 뛰어났었다. 인척관계에 있던 은영명(殷令名)·은중용(殷仲容) 부자도 또한 당대 초기의 유명한 서예가였다.
안진경은 "집안이 가난하여 종이와 붓이 없었으므로 담벽에다 황토로 연습하여 서예를 익혔으며, 해서(楷書)에 특히 뛰어났다"고 한다. 벼슬길에 나간 후에는 장욱(張旭)에게 배워 서예에 더욱 진전이 있었다. 그후 남북을 두루 다니며 관리생활을 하면서 유명한 석각(石刻)을 많이 보았다. 예컨대 한대(漢代)의 여러 비(碑), 타이산 산[泰山]에 있는 북제(北齊) 때의 〈금강경 金剛經〉, 남량(南梁) 때의 〈예학명 瘞鶴銘〉 등을 두루 보면서 시야가 넓어져 필법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안진경은 해서·행서(行書)·초서(草書)에 모두 능했다. 그의 해서는 장엄하고도 웅장하며 기세가 툭 트여서 마치 단정한 선비를 보는 것 같다.
평론가들은 〈중흥송마애 中興頌磨崖〉·〈원차산비 元次山碑〉·〈송광평비 宋廣平碑〉·〈안씨가묘비 顔氏家廟碑〉 등과 같은 만년의 작품을 높이 친다. 〈제질문고 祭侄文稿〉의 필적, 〈제백부고 祭佰父稿〉·〈쟁좌위 爭座位〉·〈채명원 蔡明遠〉·〈송류태충서 送劉太沖敍〉 등의 첩(帖)에 나타난 그의 서체는 힘차면서도 급작스럽게 꺾이는 등 변화무쌍하며 전서체(篆書體)와 주문(籒文)을 겸비했다. 또한 스스로 독자적인 일파를 이루어 한 획도 2왕(二王:王羲之·王獻之 부자)의 필체와 비슷한 것이 없었다. 소동파(蘇東坡)는 안진경의 서예와 두보(杜甫)의 시, 그리고 오도현(吳道玄)의 그림을 최고의 모범이 된다고 평했다. 안진경의 서예는 후대의 유공권(柳公權)·양응식(楊凝式)·소식·황정견(黃庭堅)·미불(米芾)·채경(蔡京)·조병문(趙秉文)·동기창(董其昌)·왕탁(王鐸)·유용(劉墉)·전풍(錢灃)·하소기(何紹基) 등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안진 경의 가문에서 만들어놓은 '안씨자양'(顔氏字樣)은 당대부터 청대(淸代)에 이르기까지 1,000여 년 동안 과거시험장에서 '정체'(正體)의 글씨로 쓰였다. 명(明) 만력연간(萬曆年間:1573~1620)에 이르러서는 간행된 서책의 글자체가 모두 안진경체로 되었는데, 이른바 '노송체자'(老宋體字)로서 수백 년 동안 성행해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다.



4. 안진경과 안 근례비 (기원후 709 -758)

     


당나라 현종 개원 22년(734년) 진사에 합격하여 양궁에서부터 시작 절도사 상서를 거쳐 노
국(노 나라) 개국공에 올랐다. 정치적으로 강직한 입장을 고수하여 조정의 간신들과 맞섰으
며 안록산과 이희열의 반란에 대항하다 순국한 애국충신이기도 하다. 안진경이 남긴 서예작
품은 대단히 많아 지금까지 알려 진 것이 약 70여점에 이른다. 전하는 자료를 근거로하여
그의 작품세계를 전기, 중기, 후기의 3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안진경의 나이 50세(758년)
이전이 전기작품 시기에 속한다. 이 시기는 안진경이 고인의 필법과 민간에서 유행하는 서
예를 흡수하고 소화하는 단계로 44세에 쓴 것과 46세에 쓴 것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전자는
필법에서 결구에 이르기까지 수,당시대에 민간에서 유행하던 서풍의 영향 을 반영하고 있으
며 후자는 이에 비하여 왕희지의 동방삭화찬을 본받았다고 할 수 있다.50세에서 60 세에 이
르는 기간을 중기로 보는데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54세에 쓴 것과 56세에 쓴 것을
들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안진경의 강건하면서도 웅후한 기풍과 기세가 당당한 풍격으로
이미 형성되 고 있는 작품들이다.이 시기의 행서 작품으로 50세에 쓴 쟁좌론이 명작으로 꼽
힌다. 60세 이후의 후기 작품시기의 명작은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돌 많은데 대표적인 것
으로 63세,64세,68세,그리고 71세 에 쓴 안근례비와 72세에 쓴 안성정가묘비 등이 있다. 안근
례비로 대표되는 안진경의 새로운 해서는 동진 이래로 서단을 점유하고 있던 왕희지부자,우
세남,저수량을 대표로 하는 소위 남파에 대하여 필법은 물론이고 결구와 포치 그리고 먹법
등 각 방면에 대하여 거대한 혁신을 가져온 것으로 이른바 안체로 불리운다. 필법상에 있어
서 남파는 글씨가 가벼우면서도 수려한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손가락을
운용하는 곳이 비교적 많다. 이에 대하여 안진경이 발전시킨 것은 여기에다 더욱 강한 팔힘
을 가한 것이다. 그리고 교묘하게 장봉과 중봉을 운용하는 필획의 특징을 나타내어 분명히
종이의 뒤를 뚫는듯한 강한 필력을 드러나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잠두란 가로획이나 세
로획을 시작하는 부분이 마치 누에의 머리처럼 둥글게 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연미라는 것
은 파임을 마무리할 때 먼저 붓을 힘껏 눌렀다가 끝이 뾰족하게 나오게 하는 것으로 이 부
분의 모양이 마무리 할 때 먼저 붓을 힘껏 눌렀다가 끝이 뾰족하게 나오게 하는 것으로 이
부분의 모양이 마치 제비의 몸통과 꼬리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 것과 같다하여 이름한
것이다) 필법상 또 하나의 특징은 가로획은 가볍고 세로획은 무겁게하여 모든 글자들이 육
중하면서도 입체감이 나도록 한 점이다. 결구상에 있어서 남파의 서예가들은 모두 왼쪽을
긴밀하게 하고 오른쪽은 넓게하여 오른쪽 에깨가 약간 들리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것은 전
체의 자형을 옆으로 조금 쏠리게하여 영활하고 교묘하면서도 소쇄한 풍격과 자태를 나타내
려고 함에 있는 것이다. 안진경은 이러한 남파위 특징에서 벗어나 비교적 단정하면서도 평
평한 필획을 사용함으로써 더욱 장중하고 정대한 시풍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결구는 분
명히 고대 전서나 예서가 정면으로부터 형세를 취하는 것을 흡수한 필법으로 당시 이러한
필법을 해서에 운용한다는 것은 확실히 오랫동안 내려온 인습을 타파하는 일종의 혁신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안체에 있어서 또 하나의 주의해야 할 것은 좌우로 내려긋는 획의 중심
이 안을 구심점으로 하여 약간 타원형을 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남파의 해서에서
는 찾아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이러한 특징은 당연히 필법상의 개혁이라고 볼 수 있으나 이
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결구상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이것을
마치 고대의 활에 비유해 보면 단단한 나무에 팽팽한 활시위를 매겨 잡아 당기면 전체 활모
양은 약간의 타원형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거기에서는 자연히 강한 탄력이 넘쳐 흐른다. 안
진경이 사용한 이러한 필법은 결국 결구상에 있어서 글자 전체의 모양을 더욱 둥글고 두텁
게 함으로써 안으로 강한 힘을 응축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포치면에 있어서 남파의 글
씨는 일반적으로 행간의 거리와 자간의 간격이 비교적 크고 넓어서 고요하면서 그윽한 분위
기를 자아내게 한다. 이에 반하여 안체는 행간과 자간의 간격을 되도록 긴밀하게 한다. 또한
남파의 글씨처럼 비교적 소자를 위주로 하지 않고 대자와 소자가 모두 있게 할뿐만 아니라
이것을 쓸 때에도 시원하면서도 웅장하게 하여 전체의 포치에서 충실하고도 조밀한 느낌이
나도록 하고 또한 글자의 행간에서도 팽배한 기세가 나타나도록 하였다. 먹을 쓰는 방법에
있어서 남파는 해서나 초서를 막론하고 모두가 화려하고 수려하면서도 매끄러운 것을 추구
하는 반면에 안체는 진하면서 매끄러운 것을 함께 사용하고 있으며 행초를 쓸 때에는 간간
히 갈필도 구사하여 절박하면서도 호쾌한 기상을 나타내었다.

마지막으로 안진경의 행서로 유명한 쟁좌위에 대해 간단히 소개한다. 쟁좌위는 대종 광덕
2년 (764년 ) 안진경이 당시 복야로 있던 곽영의에게 보낸 편지이다. 곽영의는 당시 환관이
었던 어조은에게 아첨을 하느라고 두 차례나 열린 융숭한 잔치에서 백관을 지휘하여 자리
에 나아가게 함으로써 어조 은의 자리를 높게 빛나도록 하였다. 안진경은 이러한 사실을 곽
영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엄중하게 비난하였으며 심지어는 그를 "어찌 대낮에 돈을 챙기는
선비와 다르랴 !" 라고 까지 질책을 하였다. 더욱 가치있는 사실은 당시 대권을 손아귀에 쥐
고 오만방자한 행동을 마음대로 하면서 조정의 신하들을 사람처럼 여기지도 않았던 어조은
에게 안진경의 이러한 행동은 그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 쟁좌위
를 보면 글씨 전체에서 기세가 충만하고 강하면서도 활달할 뿐만 아니라 많은 글자와 행간
에서 호방한 기운이 물씬거리면서도 자태는 생동감이 넘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모
두 안진경의 강직한 성품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곧은 마음 그리고 절박하면서도 중후한
성정이 그대로 작품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넷 자료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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