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풍경

4월의 눈

라즈니쉬 2008. 4. 24.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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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3. 4. 25일...
오늘은 쉬는 날이다. 눈이 많이와서 작업을 못한다고 한다.
새벽에 창밖을 보았더니, 내리는 눈에 가려져 20미터앞의 
사무실 건물동도 안보이더구나. 

어젯밤 잠을 설친관계로 다시 잠시 눈을 붙였다 이제서야 일어났다.
2층에서 창밖을 보며 또 네 생각을 한다.
네가 사는 도시에도 지금 눈이 내릴까?...

어젯밤 11시, 불꺼진 사무실 전화기앞에서 한 시간을 앉아 망설였지만,
결국 네게 전화를 걸지못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잘 있니?"라고 묻는 말... 그 한마디외엔 더 할 말이 없을 것 같아서.
전화를 들고 이어지는 짧은 수초간의 침묵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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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너 있는 곳까지는 저 설산 몇개를 넘어야 할까?

난 이곳 지리도 잘 모르며, 네가 있는 도시까지의 거리도 잘 모른다.

네가 살고있는 이 나라에 나도 잠시나마 생활해보고 싶었고,

네가 생활하며 귓전에 듣는 이방인들의 말소리를 나도 들어보고 싶었고,

네가 맞는 눈과 비를 나도 맞아보고 싶었고,

네가 매일 먹는 음식들을 나도 맛보고 싶었다.


저번 주 너와 나의 통화...

 

"너 보려고 왔단다."...

"그런 말 좀 하지마세요..."

 

 





3.

그래!... 어쩌면 난 다른 이유로 온 것일지도 모른다.
오래 전, 이 나라의 여러 소설에서 읽었던 아련한 기억을 잊을수 없어서.
주인이 수십년을 정성들여 가꾼 어느 작은 온천여관에 들어,
다다미방 탁자앞에 유카타 차림으로 앉아서 데운 청주를 음미하며,

불빛 은은한 밤의 정원석 돌길을 거닐어 보고 싶었는지도.

그리고 난, 이 나라의 하루끼도 무척이나 좋아한다.
가와바다 야스나리로부터 에쿠니 가오리까지...
지금은 줄거리도 잘 생각나지 않는 몇 권의 책들을 읽으면서, 
언젠가 한번은 이 나라의 낯선 여관에 들어 술을 마셔보고 싶었다.
 

네 마음이 불편하다면... 내가 이 나라에 온 이유는 네가 아니었다며...
아주 하찮은 이런저런 이유를 10개 이상도 말해줄 수가 있다.  
내 마음의 진실보다 앞서는, 네 마음의 평온을 위해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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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너와 나에게 이국땅, 여기 하늘 아래에서는,

눈이 와도... 비가 와도... 잿빛구름이 하늘을 덮어도...

눈부시게 푸르른 날에도... 떠나오기 전보다 네 생각이 더 난다.

나, 아무래도 이 땅에 잘못왔나봐. 돌아갈거야. 가기전에 너 한번만 보구...


같은 나라 하늘아래 같이 있는 게, 네게 그토록 부담이 될줄은 ...

난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네게 부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함께 차를 타고 대륙의 먼지날리는 비포장도로를 헤메다니던 그 시절부터...

 






 

5.


우에다역에서 열차를 타고가서 또 중간에서 갈아타고... 

도꾜까지 1시간 반...

그리고 도꾜에서 다시 신칸센으로 3시간이라 했던가?... 

쉬는 날이면 너를 생각하며 와 보곤 했던, 네게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있는 우에다역.

그 역을... 나는 이제서야 드디어 출발하려 한다.


다녀보지 못한 이국의 낯선 길을 향해 긴장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환승역사에 내릴때마다, 안내표지판 앞에서 잠깐씩 행로를 연구하고,

 역무원에게 더듬거리며 물어보고, 티켓팅 하기를 몇 번...

나는 지금... 초라하고 피로에 지친, 짐가방 두개든 한국인일뿐.

이 남루한 한 남자가... 지금... 너에게로 가고있다.

 

 

 



 

6.

JR선을 내려, 다시 도꾜에서 신칸센을 타고...
깜깜한 창밖을 응시하다가... 눈을 감다가... 그렇게 달린지 몇시간.
그리고... 도착한 어느 역사를 나와, 다시 택시를 타고 10여분을 달렸던가?...

아!... 이 아름다운 도시 한켠의 어디에선가 지금 네가 살고있는거구나.
눈앞의 아름다움은 과거를 잊게하지.
행복했던 과거도 잊혀질진대, 하물며 그저 그랬던 과거쯤이야...

역사앞 벤치에 앉아 너를 기다린다.
신칸센을 타고오며 첫 마디를 뭐라고 할까를 내내 생각했지만,
어줍잖은 말 한마디만으로는 마음과 세월을 결코 이을 수 없음을... 나는 잘 안다.
말없이 보고 있기만 한다고 해도, 우리... 그렇게 어색하진 않겠지.






7.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10미터앞에서 그녀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

그녀, "용하게 찾아왔네요"...  

나, "얼굴이 많이 여윈 것 같네..."

역사앞의 푸르스름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이자까야.
백열등에 세워진 갓은 탁자위 술잔만 비출 뿐, 서로의 얼굴을 숨겨준다.

단답형의 짧은 얘기를 어색하게 간간이 나누며 청주를 세잔쯤 마셨던가?...
"난... 널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어..."

.

.


"요즘 누가 그런 무식한 사랑을 해요?..."

난... 지금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그 때 그녀앞에선, 또 왜 그리 무식했을까?...
난... 사랑을 위해서 바칠 수 있는 최고의 행위는 상대방을 위한 죽음이라고...
왜 그런 무식한 생각을 하며 살아왔던걸까?... 

 


 

 

8.

"내일 여기서 몇 번 출구로 나가서 공항행 버스를 타세요."

다음날 그녀는 하루 휴가를 내었다며, 같이 전철을 타고 가서
산노미야역앞의 공항버스 정류장을 알려주었다.
내일은 마중을 못한다며...

돌아오는 길은 차이나타운과 센타가야를 거쳐 도보로 손을 잡고 걸어왔다.
그녀의 일본인 남자친구에 관한 얘기를 들으며.

그리고 그 도시에서... 그토록 그리웠던 사람을 만났지만,
그녀는 집에 들어가고, 나는 그녀의 집 인근 모텔방에서 아사히만 마셔댔다.

그녀가 살고있는 고베, 천만불짜리라던 대도시의 야경...
그러나, 난 더 이상 그 아무것도 보고싶지 않았으며,
한국으로 돌아간 후의 일 따위는 더더욱 생각하기 싫었다.
그 때, 나에게 필요했던 단 한가지는... 술밖에 없었음을.

앞으로 난... 무엇을 위해 살아야만 할까?...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도... 그럴만한 가치는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도시에서 3일을 머물렀던가?...

 

 






9.

살아왔던 지난 시간들... 나를 스쳐갔던 사람들... 그 안의 사랑얘기 몇 개...
그녀와 난... 사랑했던 것일까?...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고운정보다 미운정이 이토록 무서울줄이야...

내가 보았던 지금의 그녀는, 몇년 전 대륙땅의 그녀가 아니다.
차 달리는 비포장 도로를 걸어다니며 함께 먼지마시던 그녀도 아니고,
2 대의 오토바이뒤에 겁없이 몸을 나눠 싣고 이동하며, 나와 함께 대륙을 개척하던 그녀도 아니다.
내 얼굴을 향해 책상위의 사무용품을 마구 집어던지던 그녀도 아니고,
공과 사를 지나치게 구분하는 나로 인해, 설움에 북받쳐 울부짖던 그녀도 아니다. 
몸이 아플때면 나를 병원에 데려가서 주사를 맞혀주던 그녀도 아니고,
업무를 위해 공휴일도 없이 일해주던 그녀도 아니다.

내가 알고있던 그녀는...
다만 그 때 그 시간, 그 찜통같았던 대륙의 한 공간에서만 존재했던, 
내겐 철부지같은 막내여동생이자 어머니같았던 25세의 여자였을 뿐.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그녀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대륙을 떠나는 순간... 이미 죽었다.

세월은 모든것을 빛바래게 하며 흘러갈 뿐이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도 흐르고, 사랑도 흘러간다.
어느 한 때, 조금은 아팠던 사랑이 있었다고,
우리는 다만 추억할 수 있을 뿐. 

비행기안에서 내려다보는 간사이 공항은 말없이 누워있다.





10.

재팬 알프스!... 눈내리는 4월의 나가노.
살다보면 또 갈 수 있을까?...

아침 6시 30분이면 차를 타고 올라가곤 했던 해발 1,500미터 고원...
수십년된 수목들이 하늘을 가려 컴컴하기만 했던 숲속 산길도로를.
숲을 벗어나면 켜켜이 쌓여있는 구름자락같은 설산능선들.

나... 다시 태어나면 그녀와 같이 그 곳을 여행할 수 있을까?...

그녀가 떠난 열사의 대륙에서  눈내리는 나가노까지...
그녀가 떠난 후에서야 뒤늦게 그리워했고, 
이제 이렇게 만나고 나서야 그리움을 지운다.
내가 하는것이 욕심이라면 붙잡고... 사랑이라면 놓아라!...

사람은 기다려줄 수 있지만,
사랑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우리 인생 어느 한때, 다만 사랑이 존재했을 뿐.


Sese!... 행복하길 빌께. 



 

* 내안에 우는 눈물 外 

 

 

$$17김호남 ['07 차(茶) 국악명상음악] - 내 안에 우는 눈물 (대금 Solo) AAA-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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